힘겨운 한 걸음부터 시작하기
올해를 제외하고 10년 음주 인생에 내가 필름이 끊켰던 적은 세 번을 넘지 않는다. 엄했던 엄마를 제외하곤 단 한번도 그 누구도 '술'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다. 술로 누군가와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몇년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3개월을 내리 자취방에서 술을 마셨던 그 때도 이러진 않았다. 혼자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다가 울면서 잠이 들었지 다음 날 일어나 나 스스로를 싫어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나 스스로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을 따라 타 지역으로 이사온 이후 나는 매일 술을 마셨다. 주 2회였다가 주 3회였다가 주 6회이기도 했다. 혼자서는 아무리 많이 마셔도 4캔 이상 마시지 않던 내가 막걸리를 사다 마시거나 술이 모자라 친척 어르신이 두고간 빨간 뚜껑의 소주를 오렌지 쥬스에 섞어먹어 알콜에 대한 갈망을 채웠다. 술이 술을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술을 마셨다. 매번 더 많이 마시기 대회에 나온 사람처럼 나 스스로의 기록을 갱신했고 과음을 하는 날이면 한달에 한 두번은 꼭 기억을 잃었다.
기어코 실수를 했다. 몇일 전 흥겨운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귀가를 했는데 그러다 걸려온 전화를 받은 이후부터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와인병을 옆구리에 끼고 화단에 앉아서 한참을 떠들었다. 뭐라고 떠들었는지 모르겠는데도 계속해서 떠들었던 것만 생생했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일어나 사과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사과는 그저 '술 취한 나의 전화를 그렇게나 늦은 밤까지 오래 받아준 이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관계가 무너져있었다. 도저히 내가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무너졌는지 떠올릴 방법이 없었다. 그저 그날 받은 메세지에서 상대방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전해 받을 뿐이었다.
하루를 꼬박 앓았다. 관계를 무너뜨렸다는 사실만큼이나 더 나를 괴롭게 한 것은 나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리고 그 자책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떨게했다. 내가 나를 미워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함이 손끝에 그대로 전해졌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아는 내가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이러다가 망가지는건 아닐까 무서워졌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두시간 마다 침대에서 깼다. 심호흡을 하고 명상을 해야 겨우 잠에 들었다.
["너무 외로워보여. 너무 너무 외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최근의 감정 변화들을 묵묵히 듣던 친구는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살면서 외로움 한번 못 느끼고 살았는데 외로움이며 고독함이며 남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나였는데 그런 내가 처절한 외로움에 울부짖고 있노라고 친구는 설명했다.
"사람을 잃은 것보다 더 슬픈건 내가 나를 싫어하게 된다는거야"
["너가 왜 싫어? 어떤 점이 싫어?"]
"내가 변했는데 그 변한게 싫어. 내가 알았던 나는 의존적이지도 않았고 추진력도 좋았어. 적어도 술에 취해서 필름이 끊킨채로 아무말이나 지껄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 나의 변화가 너무 싫은데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체도 싫어. 절제라는 것을 못하고 있는게 싫어"
["왜 못 하는거 같아?"]
친구와의 대화는 한 마디 한 마디에 한 차원 한 차원씩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친구는 내가 자꾸만 상황에 적응해 간다고 했다. 나에게 처해진 상황에 적응을 하고 있는데 그건 그것을 이겨내는게 아니라 단순히 익숙해져가고 있어서 무뎌지는 것이라고 했다. 본인이 본인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데 마치 가시 덤불속에 있는 파묻혀 있는 사람이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면 따가움이 온 몸에 닿으니까 그러니 그저 그 덤불속에서 숨쉬고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과거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루틴이 명확했다. 운동을 하고 사진을 찍고 청소를 하고 목욕을 하면 그날의 스트레스는 말끔히 사라졌다. 조금 더 힘든 날엔 운동을 더 했고 고민이 많은 날엔 사진을 찍었다. 복잡한 마음엔 청소를 했고 슬픈 날엔 목욕을 더 오래 했다. 그런데 분명 이 곳에 와서도 똑같이 운동을 하고 사진을 찍고 청소를 하고 목욕을 하는데 나에게 주어지는 자극이 자꾸만 깊어져 그걸 스스로 치유하기엔 내성이 생겨버린거다. 그래서 같은 양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는 나에게 주어지는 무게들을 덜어낼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는 너의 세계가 없잖아"
나의 삶의 터전을 내려두고 3개월만 있겠다고 내려온 이 곳에서 나는 벌써 4개월 반을 보내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일거리가 없어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서, 이곳의 집이 넓고 좋아서 이런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이 곳에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을 위한 이유는 없었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24시간 자극을 주는 세상 속에 살면서 결국 그것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게 되면서 나를 둘러싼 관계들도 위태해졌다. 두터운 신뢰가 있는 관계가 아닌 이상은 마치 타노스의 손가락 한번의 튕김처럼 바스락 거리며 재처럼 날아가버린거다.
친구는 말했다. "태풍의 눈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자기가 태풍 속에 있는지 몰라. 나와야 한다는 사실 조차 알 수 없게 되는거야. 지금 너가 그래. 너는 그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 조차 자꾸만 잊고 있는거야. 너를 지키기 위해서 나와야 하는거야. 계속 있다가는 정말 거기에 매몰되어서 나중엔 영영 나올 수 없을지 몰라."
어쩌면 나는 태풍 속에서 수없이 많은 할큄을 당하면서 그 할퀴어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술을 적게 마시려고 노력했고 운동을 더 많이 하려고 했고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갔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이 태풍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하는 것이었다. 태풍에서 벗어남으로서 나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내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었다. 한발자국 멀어져 나를 보아야했다. 지금 내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알아야 했다.
[너가 지금 이렇게 몸부림치는 것도 스스로를 사랑하려고 하는 몸부림이라고 생각이 들어. 하나씩 차근차근 해보자] 라고 전해온 친구의 메세지. 그래 나는 나약해졌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졌다.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 예전의 내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을 해야하는 시기가 왔다. 태풍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나뭇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나는 늘 부정적인 감정이 다가올 때 이 감정들을 억누르거나 날려버리기 위해서만 노력했다. 이제는 그러한 감정을 유발하는 원인 자체를 해결해야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왜 내가 변해야하는지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그저 변한 내 모습을 나 스스로 외면하려고 했다. 나에게 밀려온 것들이 단순히 일시적인 파도라 생각하고 그 파도를 타는 방법을 배우려 애썼다. 하지만 이건 나에겐 왔다 사라지는 파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돌고 있는 폭풍이었다. 무너진 관계를 직면하고 나서야 폭풍을 빠져나와야하는 동기를 얻게 되었다. 소중했던 관계를 잃고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힘을 조금이나마 얻게 되었다. 모든 것을 다 얻을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나를 지켜낼 기회가 주어져 참으로 감사했다. 쉽지 않겠지만 태풍의 눈 속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무거운 걸음을 한 걸음씩 내딛다보면 어느새 태풍을 저 멀리서 바라보는 그런 위치에 와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