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에 만나요.

한라산 소주

by 리아

한라산 소주를 처음 알고 먹게 된 건 순전히 제주를 사랑하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소주보다 맥주나 막걸리를 선호하던 나로서는 참이슬 후레시보다 높은 도수의 소주를 먹는다는 것은 꽤나 도전적인 일이었다. 그 어떤 소주보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이론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지만 한라산 소주를 마신 다음날에는 숙취가 없다고도 했다. 물론 술을 마셨는데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저 음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음주 다음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함께 술을 마시자고 권하기 위해 대는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기꺼이 술잔을 들었다.

내 앞에는 늘 맥주가 있었는데, 한라산을 만나고 음주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 ⓒ 2018, Lia, All rights reserved.

그렇게 한라산 소주를 마셨다. 어른이 된 나의 제주는 한라산 소주에서 시작되었다.


나처럼 술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한 가지 팁을 주자면, 한라산 소주에 토닉워터 적정량을 탄 후 레몬 슬라이스를 하나 살포시 올려주면 된다. 소주와 토닉워터 비율을 어느 정도로 해야 될지 모를 땐 마셔가면서 제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는 본격적인 음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취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술에는 취할 수가 없지.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 것은, 마침내 한라산 소주로는 취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단, 조건이 있다. 제주에서 마시는 한라산 소주여야 한다는 것. 육지는 다르다. 물론 제주 흑돼지 같은 특산품을 안주로 파는 식당이 아니고서야 한라산 소주를 파는 식당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어쨌든 그의 말이 마음 깊은 곳으로 다다랐을 때는 내가 조금 취해있을 때였다. 술이 아닌, 다른 것에 말이다.

너무 한낮이었다. 거한 회 한상차림을 시켰으나 회가 나오기 전까지 오로지 우리 앞에는 맑고 투명한 한라산 소주 한 병만 있을 뿐이었다. 안주가 나오기 전에는 술을 입에 대고 싶지 않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잔을 부딪치자 술잔에 담긴 술이 출렁이며 서로의 잔을 향해 뛰어들었다. 덩달아 나의 마음도 일렁였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 들어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낼 수만 있다면, 낮은 곳으로, 이정하. / ⓒ 2019, Lia, All rights reserved.


횟집의 창문은 통창은 아니었지만 테이블에 앉았을 때 내 시야를 방해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컸다. 바깥으로 보이는 성산일출봉과 그 앞바다가 훤히 다 보일 정도였다. 태어나서 성산일출봉을 이렇게 가깝게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일출을 볼 수는 있는 건지 의문을 품을 만큼, 나는 단 한 번도 성산일출봉에서의 일출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 2019, Lia, All rights reserved.

갖가지 종류의 회가 담긴 한상이 차려졌고 처음 맛보는 고등어회와 갈치회를 한 점씩 조심스럽게 입속으로 넣었다. 아,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제주의 맛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야말로 한겨울의 제주일지도 모르겠다. 회 한 점에 한라산 소주 한잔.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리는 회가 아쉬우니 한라산 소주로 마무리를 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번뜩 들었다. 소주를 마실 때면 나의 주량을 확인하기 위해 몇 잔을 마셨는지 세곤 했는데, 그날만큼은 잔을 세지 않았다. 아니, 셀 수 없었다.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내가 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쏟아질 듯 크게 다가오는 성산일출봉을 품은 한겨울 제주의 풍광과 기꺼이 제 몸을 내어준 물고기의 숭고한 희생정신뿐이었다.


한낮의 음주는 사람을 조금 더 대담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그 힘을 빌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우리 다음에는 꼭 해 질 녘에 만나요.
회도 좋고 한라산도 좋고 성산일출봉도 좋지만,
그땐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담아낸 당신의 눈망울에 취할지도 모르니까.

같이 걷자. / ⓒ 2020, Lia,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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