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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ettyfree Aug 15. 2020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던데

인간은 가끔 되돌아봐야 하는구나





겨우 열셋이었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나이 말이다.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그 꿈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영영 사라지는 듯했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잘 팔리는 작가가 될 자신은 없어 꾸준한 수입원이 되어줄 만한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작가를 겸업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영 어리석은 길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선생님이 된 이후에도 제대로 된 작가 수업을 받고 싶기는 녹록지 않았다. 작가의 꿈이 이대로 좌절되는 건가, 포기할 뻔… 했지만! 그럴 순 없지. 어쩌면 그림책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장편 동화나 소설은 쓸 자신이 없어도 글밥이 상대적으로 적은 그림책 정도면 꽤 도전해볼 만하다는 호기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7월의 무더운 어느 여름날, 모니터 앞에 앉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원고를 적었더랬다. A4용지 한쪽 분량도 안 되는 몇 줄짜리 원고에 무슨 자신이 그리 있었다고, 수정조차 하지 않은 채로 그림책 출판사 수십 개에 투고 메일을 보내버렸다. 하지만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문장력은 좋으나 이야기의 결말이 아쉽다' '신선하지만 주제의 폭이 좁아 수익을 내기 어렵겠다' '배경을 살짝 틀어서 다시 작성한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오겠다'는 등의 합평 아닌 합평을 받았을 뿐이다. 흠. 첫 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실제 작가와 연계하여 출판까지 이어준다는 황금 같은 연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싶어 얼렁뚱땅 도전해봤지만, 또 탈락이었다. 대체 이런 건 무슨 기준으로 뽑아주는 거야?! 계속되는 넉다운에 급기야 화가 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날 뽑아주는 게 난센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절당한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아니, 사실 피드백을 준 출판사가 보살급이다.


비율로 치자면 열 군데 중에 세 군데 정도에서만 답장이 왔고, 대부분은 투고해주셔서 감사하지만 반려하겠다는 짤막한 내용만 담겨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어느 어느 부분만 수정한다면' 좋은 원고가 될 것 같다는 답변을 준 출판사가 있었으니, 왠지 내 글에도 가능성이 있단 말인 것 같아서 그 와중에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 딱 거기까지. 수정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지만 결국에는 반려였기 때문에, 그리고 핑계를 대자면 학기말이라 바빴기 때문에 메일을 확인하고 덮어버렸다.








".... 수가 꿈이에요."

"뭐라고?"

"가수... 요."


고학년이면 으레 하는 학생상담에서 여학생들이 어깻죽지를 한껏 접고 이야기하는 장래희망의 대부분은 '가수' 혹은 '아이돌'이다. 평소에 친구들 앞에 나서서 bts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는 자칭 '아미'인 A의 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외모가 TV에 나오는 아이돌보다 한참 못 미친다고 생각했는지, 친구들이 알면 비웃을 거라 여긴 건지, 아무튼 다른 친구들이 절대 알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살포시 꺼낸 꿈 역시 가수였다. 나 어렸을 때도 가수 하겠다는 친구들 많았는데. 상담의 성공 제1원칙인 공감 카드를 꺼내자 A는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엄마 아빠는 반대하지 않아 오디션을 여기저기 보러 다니고 있는데, 통 연락이 없어서 기가 죽는다고 말이다. 가뜩이나 속상한데 수학 성적까지 떨어져서 점점 엄마 눈치가 보인다며 이제 포기할까 싶다는 아이의 눈을 보고 내가 말했다. 왜 꼭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어렵다면, 한 마리 토끼를 잡은 뒤 나머지 토끼를 잡으면 된다. 작가의 꿈을 뒤로하고 선생님이라는 꿈을 먼저 잡은 나처럼 말이다. 


출처 : 대화의 희열 2


<대화의 희열>에 나온 작가 김중혁은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직업을 전전했다.  '소설가로서의 자신'만큼은 계속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다른 직업인으로서의 자신에게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A의 꿈을 서포트해주는 것이 꼭 A의 부모님만 되리라는 법은 없지. 지금 안 된다고 좌절하지도 말고, 다른 일 역시 소홀히 하지 않는 A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이와의 상담을 마치고 나서,

나는 내 또 다른 꿈에 최선을 다하고 있나, 라는 반성 아닌 성찰을 하고 있었던 찰나, 도서관에서 예약도서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무슨 예약도서인고 하니, 한창 그림책 원고를 쓸 때 참고 서적 리스트업을 한 책 중 하나였다. 숱한 투고와 거절로 마음이 약간은 시들해져 있었기에 빌리러 갈까 말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얼마나 좋은 책이길래 그 많은 사람들이 빌려갔나 궁금했던 마음 반, 밑져야 본전이지 싶은 마음 반으로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 길로 예약도서를 포함해 읽고 싶었던 책 다섯 권을 꽉 채워서 빌리고 나니, 잠시 사그라들었던 그림책을 향한 의지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일전에 썼던 원고를 조금 수정해볼까? 하는 깨알 같은 의지도 생겼났고. 그래, 마음 잡고 수정해보는 거야! 다시 펜을 잡으려고 생각하니, 전문가인 출판사 편집장님들이 나에게 해주셨던 금쪽같은 조언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날에 덮어두었던 메일함을 다시 열어보았다.



… 기획은 좋은 것 같습니다만, 이야기의 구성을 옛날이야기가 아닌 현재 무대로 다시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 제안을 합니다^^ 재구성이 가능하시다면 수정해서 보내 주시면 다시 천천히 검토하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일러스트도 직접 하신다고 하니, 몇 개의 샘플을 보내 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어? 재구성을 해서 보내면 다시 검토해주신다고?

 전에 읽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완전한 반려라고 생각했었는데, 왠지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답변인 것 같아 원고를 수정해서 이 출판사에 다시 보내보기로 결심했다.











 조언해주신 대로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고치고, 참고서적을 읽어보니 빈틈이 있었던 부분을 다시 메워 출판사에 다시 메일을 보내보았다. 그리고 그중 한 장면을 일러스트로 그려 덧붙여 첨부하였다. 물론 이 작업만 하는데도 하루가 꼬박 소요되었다. 하, 됐다. 하루를 통째로 그림 그리고 글 쓰는데 투자했지만, 왠지 출근했을 때보다도 더 피곤하고, 더 뿌듯했다. 만약 이게 잘 안 되더라도 오늘의 뿌듯함은 잊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에 들었다.




 하루 만에 답이 올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수신 확인은 되었는데 답이 오질 않았다.

 그래, 내가 아동문학 전공을 한 사람도 아니고. 그림도 엄청나게 탁월한 건 아니니, 당연한 걸 거야. 엄청난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왠지 우울한 마음에, 뿌듯함은 사라지고 좌절감이 나를 잠식해버리고 말았다. 그대로 땅굴을 파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잠식되어버린 채 끝낼 순 없었다. 오랜만에 생긴 열정으로 하루를 꼬박 소요했던 원고와 그림인데, 그러기엔 조금 아깝단 말이지. 나는 평소 눈여겨보았던 그림책 출판사 서넛에 다시 메일을 보내보았다. 그리고 이것도 답이 오지 않으면 한동안 그림책과는 요원해지겠어- 생각을 하며 까무룩 낮잠에 들었다.




 그날은 특이하게 낮잠에도 꿈이 있었다. 옛 친구들을 만나 깔깔대고 웃었던 꿈인데, 삼십여분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기분이 썩 좋았다. 그리고 평소대로 가장 먼저 나의 친구 스마트폰의 안부를 물었는데, 메일 앱에 답장 알람이 뜬 것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원고는 잘 받아서 재밌게 검토했습니다. 관련하여 저희는 선생님과 간단한 미팅을 진행해 보고자 합니다만, … 한 번 만나 뵐 수 있을지 여쭙니다.




 서너 번 읽어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출판에 성공한 작가의 투고 후기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이런 메일을 내가 직접 받아보다니!


 아직 출판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이미 그림책 작가가 된 것처럼 설렜다. 일단 내 원고를 귀하게 여겨준 출판사가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출판사 측에서 골라준 날짜는 안타깝게도 내 여행 일정과 겹쳤으나, 알게 뭐야. 난 이걸 먼저 해야겠어! 여행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이 미팅은 꼭 성사해야겠다는 의지에 당연히 그 날짜에 만나 뵙고 싶다는 답장을 보냈다.











 사회생활을 안 해본 것은 아니나, 출판사 미팅은 처음이라.

그리고 출판사 미팅에 관한 후기는 인터넷에서 잘 찾아볼 수가 없어서, 나에게 그림책 작가의 꿈을 심어주신 선배 교사에게 연락을 했다. (꿈을 심게 된 계기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 그리고 출판사 미팅을 할 때 유의할 점에 대해서 몇 가지를 여쭈었다. 선배 교사(라고 말하고 귀인이라고 읽겠다.)는, 출판사 미팅을 할 때 수정 방향이나 출간 일정, 인세 조건 등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되나, 무리한 조건을 요구할 경우에는 시간을 달라고 하고 다른 출판사랑 계속 컨택하면서 조건을 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주셨다. 기획 출판인 경우 인세를 주는 것이 맞으나, 간혹 저자에게 구입을 요구 거나 인세를 책으로 준다는 출판사도 있다고 말이다.




 선배의 귀한 조언을 들은 뒤, 교보문고에 가서 연락을 받은 출판사의 그림책을 있는 대로 꺼내 읽었다. 그 출판사에서 주로 출판하는 그림책의 성향, 일러스트의 생김새, 주제의식 같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림책에 관해서는 아마추어나 다름없었으나, 나에게 연락이 온 출판사의 출판 동향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일러스트를 내가 일임하게 된다면 몸은 조금 힘들겠지만, 충분히 도전 가치가 있는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내가 '작가'로서의 나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했다. 작가라는 나의 꿈도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이미 한창 늦어버린 내 삶의 뒤안길에 있는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삶을 돌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퀴퀴한 먼지에 쌓여있지만 그 언젠가는 소중히 여겼을, 실낱같은 희망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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