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이 제일 어려워서요
역설적이게도 독일이란 나라에 와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 부터가 '안온함'과는 거리가 멀다는것을 알면서도 그런 삶을 조금쯤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옮겨 심어지겠다- 그런 다짐은 아니지만 잔뿌리도 뿌리이니 그런 의도로 하는 이야기랍니다. 뭐, 아주 번쩍거리지는 않아도 은은하게 빛을 내는 것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 만큼 어른이 되었나 봅니다. 혹은 나의 최선의 반짝임이 삼각형 구조의 중간 어디쯤, 그 근처에 머물러 있는 동료와 별 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해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적에는 '평범함'속에 속하는 일반이 되는 것이 끔찍하게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지금 있는 이 자리를 박차고 날아오를 생각만 했습니다. '저기 저 위가 바로 내자리야'하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면서요. 누가 준 것도 아닌데 내 자리라고 침 발라 놓는, 무지에서 비롯된 용감함이란. 내 발받침이 되는 것이 어떤 눈물과 어떤 삶을 희생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그렇게 도달한 곳은 낙원은 아니더라구요. 유학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접한 독일은 나에게 '네버랜드' 같은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 나에게 '당신에게 독일이란?'하고 묻자 '네버랜드' 라고 당당히 써놓기까지 했습니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 나는 그때 그 의미가 '나의 어릴 적 꿈의 무대'라는 뜻이었는데 되돌아보니 그때의 난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로 그 시간을 향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즐거웠고 눈먼 호의가 고마웠고 던져지는 웃음에 감사로 화답했습니다. 학생으로 누리는 것들이, 학교라는 울타리와 학생이라는 신분이 익숙해질 무렵 크게 한 걸을 내딛어 '사회'라는 곳으로 나와봤습니다. 그런데 큰 걱정은 없었어요. 그동안 내가 접한 독일은, 그러니까 베를린은 아주 친절했고 기회의 땅이었고 나는 준비되어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
네, 맞아요. 에거사 크리스티의 마지막 소설 한 구절 처럼 '그리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가 되겠네요. 때맞춰 코로나가 창궐했고 학교를 갓 졸업한 파릇했던 졸업생은 그렇게 침몰했습니다. 갈피를 잃고 놋도 뱡향키도 나침반도 없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조각배 위에서 발만 동동 굴렀어요. 한동안은 집 밖을 나서면 '칭챙총'이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니 뭐니 하는 부끄러운 소리를 위협적으로 하는 인간들에게 겁을 잔뜩 먹었구요. 이유 없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욕을 하고 태클을 걸고 그러더라구요. 나의 네버랜드가. 그렇게 나를 몰아세우더라구요. 그래서 혼자 길거리를 걷는게 너무 무서웠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살아볼라고 토닥토닥 길을 걸어가는 건데 나와 다른 얼굴과 다른 눈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무리지어서 자꾸 사람를 위협하더라구요.
왜 독일에 버티고 남았냐면요, 돌아가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모래성인 것을 알아서 그랬어요. 침몰하는 와중에도 조금씩 넓혀놓은 나의 세계가, 그래서 푼돈이나마 벌 수 있는 작은 나의 세계가 소중했어요. 경제활동이라는게 참 그래요. 돈 몇푼에 사람구실 하는 것 같았다가 텅 빈 통장보면 또 이게 뭔가 싶고. 그 알량한 수입이 나를 지탱해주는 작은 자존심이었어요. 한국에 간다 한들 그 세계를 일구어 나가는데 더하면 더했지, 결코 노력이 덜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구요. 사회 초년생은 어디서나 어려운 법이니까요.
A4용지 한장으로 압축되는, 독일에서 겨우 일구어낸 졸업장 말고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누구보다 나에게요. 내가 이 나라에와서 시간과 청춘을 갈아넣으며 지내온 순간들이 이렇게 침몰하면 안 된다는 그런 고집이랄까, 아집같은 것도 좀 있었던 모양이죠. 지금 이 모습보다야 좀 더 나은 인간일거야- 라는 근거없는 나의 희망에 조금쯤은 응답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여기저기 기대어 코로나의 회색 시간을 견뎌보니, 시간은 훌쩍지나고 나도 얼마간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있는 작은 바람을 들여다 봤어요.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싶은걸까?
나는 여기서 월급 따박따박 받는 그런 직장인이 되고 싶었지 뭐에요!
나의 열심과 나의 시간이 온전히 돈을 환산되는 그런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하더라고요?! 상상이나 했겠어요? 평범함에 치를 떨던, 누구보다 색다르고 더 반짝이게 살고 싶어하던 '나'인데, 내가 결국 되고 싶었던 것은 직장인이라니!
그 당연하고도 단순간 바람을 깨닫고는 어깨에 힘이 한층 빠졌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멋지게 포장하는 것도 얼마간 그만 뒀구요. 나는 안온함을 원하는구나 하고 그냥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곳에 지원서를 쇽쇽 보내고, 한편으로는 프리랜서가 되어 독일 전역을 누볐어요.
"달리지 않는 독일 기차"와 함께 땅끝에서 땅끝까지 누비다 못해 '평범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온 몸으로 체감할 무렵이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프리랜서로도 자리가 좀 잡혀가는 것 같았는데. 그랬는데 그 무렵 어깨에 힘을 쭉 빼고 본 시험에서 덜컥 합격을 해서 '직장인 으로 신분이 변경되었습니다.‘
이맘때 쯤 나는 맨날 일기장에 그런 글을 썼어요.
'실패가 습관이 돼.'
막막한 순간이 닥치면 희망찬 미래를 꿈꾸던 어린시절과 달리 이제는 '잘 안되겠거니'하는 마음을 먹는다는거에요. 그래야 나도 상처를 덜 받고 덤덤하게 지나갈 수 있어서요. 마음이 너무 힘든 날이면 글로 내 감정을 선명하게 만들기 보다는 그냥 저 문장을 썼어요. '실패가 습관이 돼.' 너무 선명한 우울함은 나에게 칼이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습관이라는거는 주체인 '나'가 원하면 바뀌는 것이 인지상정이더라구요. 그래서 이제는 실패 말고 감사함을 습관으로 만드는 연습중이에요. 지나간 모든 시간이, 나를 이루는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저는 이렇게 안온한 외노자가 되었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가는 중이에요.
네, 개나 소나 다 하는 그 직장인이요!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