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이웃 보시오.
"왜 나만 참아야 해!!!"
라고 절규하던마음과는 다르게 또 항의를 하려니 마음이 수그러든다. 어른은 이런 것일까. 내 모든 감정과 선택과 행동에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말이 통하는 이웃이면 다행이지만서도 완강하게 나오거나, 뭐 어쩌라고-라는 태도로 나오거나, 혹은 보복성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심지어 독일은 세입자가 보호받는 구조라서 얼굴 붉히게 되더라고 나가떨어지는 놈이 이사를 가야 할 것이 뻔한 상황. 직장과 걸어서 10분 거리의 이 집을 구하려고 올마나 애썼는데. 여차하면 이삿짐을 싸는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지치지도 않는 아랫집의 "빰빰빰!" 음악과 그대만 존재하는 나의 이웃이여, 뿡뿡뿡이다. 진짜.
하지만 뿡뿡거리든 빰빰거리든 흑흑 거리든. 어쨌든 고통받는 것은 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심지어 몇 달 동안 그 음악을 매일같이 듣다 보니, 아하, 어쩌면 저 친구는 이전 집이 방음이 되게 잘 되던 집이라서 저 정도의 음악소리는 용인받았었나 싶다.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들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우락부락한 체형의 아랫집 친구를 마주하고 생긴 마음은 아니지만 약간 기여를 하기도 했다. 화나면 무서울 거 같더라.
하지만 쉬는 시간에 갑자기 귓가에 달려드는 드럼소리, 베이스 소리, 이국적인 선율은 점점 소리를 키워나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약을 먹고 일찍 잠들려는 차에 음악으로 두들겨 맞고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난 날, 결심을 했다. 그래. 말을 하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무턱대고 미워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너른 마음을 가지기엔 나는 너무 지쳐버렸으니.
고민을 했다. 직접 찾아갈까? 아니면 편지를 쓸까? 아니면 관리인에게 이야기할까? 모든 경우의 수에 장단점이 뚜렷했고,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상황을 좀 더 잘 설명하여 고통당하는 윗집 이웃을 이해해 주십사 하는 글을 남기는 것이 제격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뒤에 다른 방법도 동원할 수 있으니 갈등을 풀어나갈 첫 번째 방법으로 제일 좋은 선택인 듯 싶었다.
오늘따라 흥이 난 건지, 밤이 깊도록 쿵쿵거리는 소리를 배경 삼아 상소문을 적어 내렸다.
친애하는 나의 이웃 보시오.
나는 그대를 기분 나쁘게 할 의도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외다.
그저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소.
혹시 여기가 오래된 아파트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오?
나는 그대가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것을 함께 듣고 있소.
그대의 플레이 리스트를 이제는 가사까지 읊을 수 있게 되었단 말이오.
나는 이것이 그대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소.
하지만, 하지만 말이외다. 나는 그대의 입주 이후 계속 고통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오.
혹시 가능하다면 그대가 즐기는 음악의 볼륨을 한 두어 단계만 낮춰줄 수 있겠소?
그렇게 한다면 내 집안에서 그대의 음악을 함께 공유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질 않을 듯싶소.
그대와 음악이 함께 하는 시간에 항상 나도 거기에 참여하게 된다오.
그대의 취미생활을 인정하오.
하오나 나의 쉬는 시간도 인정받고 싶소.
이만 줄이겠소. 총총
사랑과 친절을 담아, 당신의 이웃
그리고는 여전히 '음악과 나'만 존재하는 그 집 문앞으로 들고 갔다. 제발 나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작은 초콜릿도 곁들어서. 다른 이웃들이 행여나 이 쪽지를 읽을까 곱게 접어 초인종 바로 아래 찰떡처럼 붙여놓았다. 창피를 주지 않고 그저 내 상황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만 담아보려 애를 썼다. 그리고 야아! 너는! 고막이 아프지도 않냐! 하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웅땅웅땅 접어 꾹꾹 묻었다. 그저 우리가 협력해서 선을 이루자는 부탁만 남겼다. 그리고 여전히 들리는 리드미컬한 음악에 나도 모르게 몸을 둠칫거리며 집으로 돌아왔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둠칫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억지로 침대에 누었다. 이것이 떨림인지 긴장인지 달과 내 기도를 들었던 분만이 아시겠지.
그리고 밝아 온 다음날 오전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찰떡같이 불어있던 쪽지와 초콜릿은 퇴근하면서 보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이것 다 아냐고 물어본다면, 엘리베이터가 없는 독일 아파트는 끙차끙차 열심히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에 산다면 복권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부럽..)
여하튼 그 이후 음악소리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웃은 별 말도 별 내색도 없이 그저 음악소리를 좀 줄여주었다. 가끔 흥이 넘칠 때 한 곡 정도는 "으라차차!" 하게 듣다가도 금세 볼륨을 내리곤 하는 것이다. 가끔 흔적만 남은 이웃의 음악이 "빠암빠암-"거리지만 이 정도야 뭐.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나도 이웃에게 층간소음의 가해자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저 짧은 글귀 하나만으로 음악소리를 좀 줄여준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출근할 때마다 집 문을 향해 아무도 모르게 미소를 함빡 보내곤 했다. 물론 집 대문은 눈이 없으니 정말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작은 고비를 넘기고 나니 나의 고요한 쉬는 시간이 다시 되돌아왔다. 원치 않는 소음에 침해당하지 않는 고요함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고 생각하며.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을 넘어 겨울이 왔다. 그리고 집에 앉아 책을 읽던 고요함이 또다시 산산이 부서졌다.
"드르르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르륵"
와, 천장이 무너지는 날이 도래했구나. 정말 소파에 멀뚱이 앉아있다가 무릎 위에 있던 온갖 것들을 다 떨어뜨리며 펄쩍 뛰었다. 드릴을 바닥에 들이박는 건지. 땅이 헤집어진 두더지의 심경이 이런 것일까. 너무 놀라 벌렁거리는데 이제는 쿵쾅쿵쾅 사정없는 망치질 소리가 울린다.
아.. 친애하는 나의 "또 다른 이웃"이여.. 이제는 공사입니까?
망치질과 드릴소리가 섞이는 소리 위로 하늘하늘 눈송이가 내렸다. 겨울이었다.
독일생활 팁!
주말과 휴일도 조용히 해야 하는 날입니다. 하루 종일이요. 하지만 이웃들이 아주 예민하지 않다면 약간의 청소기 소리와 세탁기 한번 정도는 양해해 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다른 날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