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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독일에서] 내 생에 첫 다이슨

사치일까 투자일까

by 노란대문

그동안 밝힌 적은 없었으나 나이를 대충 예상들 하셨으리라 믿는다. 느릿하게 들어선 인생의 여름을 지나고 있다. 30살이 지나면 건강도 유료결제라던데 그래서일까, 나날이 갈수록 머릿결은 파스스 흐트러지고 영상통화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푸석과 칙칙, 그리고 다크닝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아아, 온 적도 없이 잃어버린 외모 전성기여.




피부도 그렇지만 매일같이 석회물에 절여지는 머리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머리게 뭘 바른다 해도 푸스스, 좋은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해도 푸스스. 이래도 저래도 머털도사가 되어버리고 바야바가 되어버리는 슬픈 내 머리. 드라이만 하면 해그리드가 되니 자연스레 열을 가하는 제품들을 더 사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미용실은 또 오죽 비싼가. 이래저래 방치한 머리는 점점 길어지고 푸스스해져서 종내는 꼭꼭 묶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질끈 묶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 슬프고 조금 짱나고 그랬다. 그즈음부터였을까, 자꾸 세일 기간이 다가왔다면서 내 알고리즘이 다이슨으로 점령되기 시작한 것은.


그걸로 머리를 하면 솨라락- 하고 윤기가 흐를 것만 같고, 출근시간 전에 때 빼고 광 낼 수 있을 거 같고, 덩달아 자신감도 올라갈 것 같고 그랬다. 물론 다이슨 하나로 머릿결이 갑자기 물미역같이 되지는 않을 것 을 알았지만, 혹시 또 아는가,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적이라는 순간이 있고 그게 다이슨과 함께하는 내 머리카락에도 함께할지. 그래서 열정적으로 알아봤다. 다이슨도 종류도 체감상으로 백한가지, 점박이 강아지의 까만 점 마냥 다양한 제품이 있었다. 하나를 사면 본체에다가 이것저것 더 준다는데,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고. 눈앞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전공 관련 분야에서 필요한 것을 구매할 때는 나와 내 통장의 합의만 있으면 결제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는데, 어째 내 기준에 사치품을 살라니 손이 좀 떨리는 것 이 아닌가. 헤어드라이에 이만큼 투자를 하는 것이 맞냐 틀리냐. 옳고 그름의 지점에 들어서는 종국에는 몹시 우울해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내가 그렇게 대단하게 비싼 것을 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고민을 하는 게 맞나. 하는 자괴감도 조금 들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예쁜 것은 사실 의미가 별로 없어서 실용과 필요의 지점에서만 물건을 구매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리니 더 그랬다. 그래도 동료들에게 슬쩍 물어보니 어째 죄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다못해 다이슨 청소기도 들고 있다 하니 또 드릉드릉 마음에 시동이 걸려 버렸다.


그래서 30살이 훌쩍 넘었으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다이슨을 하나 살까 해. 고민 중이야. 하면서. 내 머리가 이러쿵 저렇쿵, 출근할 때 준비시간이 이러쿵 저렇쿵. 엄마는 잠시 들어주더니 사고 싶어서 전화했구나? 얼른 사. 하며 간단명료한 대답을 넘겨주었다. 아아- 그러네. 그 짧은 통화 끝에 드디어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는 얼른 사도 되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면서 마음에 평화가 내려앉았고. 통장 안에 차곡차곡 모인 비상금의 일부가 결제되었다. 아직도 내 기준 비싼 물건을 살라치면 허락을 받고 싶어 하는 이 오묘한 마음은 무엇일까. 이렇게 한 단계 넘었으니 아마 다이슨 정도의 사치품은 이제 스스로 고민하고 결제하는 수순에 이를 것이다. 정서적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인 것일까.


묵직한 상자에 고이고이 담겨온 다이슨은 모양부터 해괴했고 또 머리를 돌돌 말아주는 능력도 아주 괴상했다.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고 한 손으로 휘휘 말리면 뽕실하게 살아나는 머리카락 컬을 즐기며 출근을 했다. 나만 아는 미모력이 소폭 상승했다. 그래도 시간은 고대로 흘렀고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다이슨만 사면 그 물건이 우리 집에 오기 전과 후로 세상이 나뉠 것만 같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아마 다이슨이라는 것은 나에게 나이를 인지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내가 사회인으로 어느 지점에 들어서고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의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왠지 그랬다. 그 가격의 집안 살림 용품(예를 들면 세탁기나 침대나 등등)을 구매할 때는 느끼지 못한 어떤 선이었다. 필요 없지만 가지고 싶어서 구매하는 사치품.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채워지고 넘어서는 어떤 선.


머릿속에 흰머리가 하나둘씩, 그리고 한 뭉텅이씩 나고 있다. 까만 머리가 지겨워 갈색으로, 노란색으로 빨간색으로 물들였던 머리가 어느새 스스로 색이 바랜다. 까만 머리가 지겹던 시절을 건너 이제는 내 자연스러운 머리 색이 마음에 꼭 드는데 흰머리를 가리려고 또 염색약을 써야 할 판이다. 인생의 만족감을 느끼는 시절과 필요가 채워지는 시기가 비례해서 흐른다면 참 감사할 텐데, 검은 머리를 잃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자 자연스러운 머리색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항상 이렇게 떠나가는 순간의 옷자락을 쥐고 아쉬워한다. 무엇을 또 아쉬워하게 되려나. 현재 가지고 누리는 것에 감사하자는 다짐을 하며 오늘도 위잉- 거리는 바람소리에 머리를 맡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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