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지에 흘러 들어갔다
그날따라 너무 오랜만인 까닭이었다. 읽고 싶었던 책이 '한인문화원'의 작은 도서관에 들어왔고, 수많은 '누군가 빌려감'의 러시를 기다려서 내가 그 책을 차지했다. 그러니 얼른 결론까지 읽고 싶어 몸이 달았다.
그래도 보통의 때 같았으면 귀는 열어놓고 있는데, 아는 길을 간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누가 일어나고 움직이는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책에 몰두했다.
내용은 점점 고조되어 덩달아 긴장감이 올라가는 부분이었다. 책장을 막 넘기는 순간 벼락같은 소리가 울렸다.
"쾅쾅쾅!"
누군가 내가 탄 시내 기차(에스 반)의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창문 바로 옆에 앉아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우당탕 하고 창문과 멀어졌다.
"왜! 뭐!"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는 말이 위로 조금 열려있는 창문으로 흘러 나갔나 보다.
창문을 두드린 사람은 한 남자였는데, 그가 세상 다급한 얼굴로 외치는 것이었다.
"내려! 내려야 돼!"
"나? 내리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얼떨떨 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기차 안에 남은 사람은 나 하나였다. 홀로 기차 안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가 외치는 소리 때문에 소란스러워지자 밖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이 더 다가왔다.
그중 나를 발견한 아주머니는 기차의 문을 열어주려고 문가로 달려왔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가 도래해서 자동문처럼 문이 열리고 닫히지만, 그 전에는 스스로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야 했다. 하지만 종종 중앙제어가 먹히지 않는 차들이 있는데 그 차는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 즉, 이미 문이 닫혀있으니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다급하게 밖에서 버튼을 눌렀지만 문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열차 안의 실내 등이 꺼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부터 '텅, 텅'하는 소리가 나며 불이 꺼지는데 여고괴담의 한 장면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다행히 낮이었고, 플랫폼의 불이 스며들어와 깜깜하지는 않았지만 '대체 나는 어떻게 될 것 인가'의 불안함이 몰려왔다.
나를 제일 처음 발견하고 내리라고 소리쳐 준 남자는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보자 앞쪽의 기관사에게 '안에 승객이 남았다'는 것을 알리러 뛰어가는 것 같았다. 그가 다른 사람을 큰 소리로 부른 는 것 같은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가 떠난 자리에 다른 사람이 또 후딱 다가와서는 '어서 내리라'라고 나를 재촉했다.
"너 빨리 내려야 해!"
나도, 나도 너무 내리고 싶어.
"문이 안 열려"
쩌렁쩌렁하게 대답하면서 다른 문이 열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차 안을 뛰어다녔다.
네 개의 문을 열어보았지만, 하나도 열리는 곳이 없었다.
"우-웅"
기차에 다시 전원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누군가 내가 여기 남아있다는 것을 알린 모양이었다. 다시는 정신없이 앉아 있지 말아야지. 휴 괜히 안도가 되어 한숨을 내뱉었다. 문 앞에 서는 순간, 안도하는 마음은 어림도 없다는 듯,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밖을 쳐다보자 대여섯 명의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져서는 '이걸 어쩌지'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나는 열차와 함께 출발했다. 열차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플랫폼의 불빛도 훅 하고 멀어졌다. 나는 얼마간 문 앞에서 얼어있었다.
'진짜, 진짜 큰일 났다.'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핸드폰 생각이 났다. 어디다가 전화를 해야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경찰? 경찰이겠지?'
열차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더니 어떤 터널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반짝하면서 객실에 불이 들어왔다. 캄캄한 어둠이 계속되었으면 멘탈이 탈탈 털려서 당장에라도 경찰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지만, 시야가 밝아지니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친구에게 '내가 이러저러해서 차고지에 들어온 것 같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인터넷이 유난히 안 되는 구간으로 들어선 건지 몇 번의 전송 실패 끝에 간신히 전달되었다. 득달같이 전화가 왔는데 서로의 말소리가 거의 이어지지가 않았다. 전화도, 인터넷도 영 부실했다.
창문 밖으로는 듬성듬성 서 있는 기둥 뒤로 다른 열차가 보였다. 차고지인 것은 확실했다.
누군가 이 열차를 운전을 했으니 이 차가 여기로 들어온 것이 아니겠는가. 아날로그를 지독히도 사랑하는 나라이니 자동운전 일리는 없었다.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밖을 확인했지만 고요한 기계소리만 가끔 들릴 뿐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퉁퉁퉁"
창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버튼을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어쩔 수 없다 싶어 경찰에게 전화를 하려고 핸드폰을 딱 드는 순간 눈앞에 무언가 보였다.
[화재 알람]
글씨를 읽는 순간,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알람 장치를 작동시키려면 다소 헐겁게 묶여있는 줄을 제거해야 했다. 잘리지 않으면 끊어내려고 열쇠를 손에 단단히 쥔 채 혼 힘을 다해 그것을 잡아당겼다.
줄은 쉽사리 끊어졌고 붉은 등이 점등되었다.
"삐용-삐용"
우렁찬 알람 소리가 객실을 울렸다. 시뻘건 불빛이 열차에 점등된 모양인지 차고지도 온통 붉은빛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은 없었다. 그 화재 알람은 문 옆에 하나씩 있었는데, 객실 내에 총 네 개의 알람이 있는 셈이었다. 우당탕탕 달려 다른 알람도 작동시켰다.
이제 객실은 온통 시끄러운 알람이 울렸고 차고지도 덩달아 빼용빼용 울려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누군가 저 멀리서 기차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KFC 할아버지의 아들처럼 생긴 그 기관사분은 세상에서 제일 말썽꾸러기를 만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깊은 한숨에서 온갖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는 말없이 기차에 들어와서는 알람 소리 속에서 본인이 누구인지 설명했다. 그리고 독일어를 할 수 있는지 묻고는 '그렇다'는 내 대답에 반색하다가 다시 표정을 구겼다. 그는 여전히 문가에 서 있었고 나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진정하라'는 이야기부터 건넸다. 10분 뒤에 다시 차가 출발할 것이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그리고 알람을 끄면서 도대체 왜! 본인이 다섯 번이나 넘게 방송했는데 내리지 않았는지 물었고, 나는 미안해 못 들었어. 같은 황당한 변명을 내놓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한번 더 설레설레 저은 뒤 '앉아있어'라고 말하곤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객실의 모든 불이 들어왔다. 그제야 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휴지를 꺼내 이마를 닦았다.
핸드폰은 그새 어마어마한 부재중과 문자 몇 개를 받은 상태였다. 마지막 연락이 '경찰에게 연락하겠다'라는 내용인 것을 보고 친구에게도 다시 연락을 해 댔다. 몇 번의 연결 실패 끝에 '10분 뒤에 여기서 나간다'는 이야기를 전 할 수 있었다.
기차는 정확히 5분 뒤 출발했다. 조금 전 사람들과 황망한 시선을 주고받았던 바로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튀어 나가서는 재빠르게 기차역을 빠져나갔다. 햇빛 아래 서서야 땀이 식는 게 느껴졌다. 친구의 전화를 받아 신나는 잔소리를 들어가며 물을 꼴깍꼴깍 털어 넣었다.
스스로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정신줄 붙잡고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