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전문직 6년, 불합리 속에서도 길을 찾으며
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세상이 단순했다. 인사이동은 5년에 한 번씩 예고된 대로 이루어졌고, 수업·학급경영·행사 준비의 사이클은 일정했다. 교무실의 분주함 속에서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장학사로 임용된 순간, 나는 그 리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첫날부터 깨달았다. 교육청이라는 곳은 예고 없이 바다가 요동칠 수 있는 곳이었다.
첫 발령지는 강화교육청이었다. 초등 출신인 내가 ‘중등 업무’, 그것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학교폭력·체육’을 맡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베테랑 선생님들이 10년 넘게 다뤄온 복잡한 사안을 초보 장학사가 맡는다는 건, 바다 한가운데 구명조끼도 없이 던져진 기분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보고와 문의 전화가 쏟아졌고, 나는 밤늦게까지 규정집을 붙잡으며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손을 내밀어주는 분들이 있었다. 선임 장학사님은 내가 지쳐 있을 때 옆자리에서 조용히 커피를 건네며 “첫해는 다 그래”라고 위로해주셨다. 체육·학교폭력 담당 선생님들은 대회 운영과 심의위원회 준비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덕분에 첫 번째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를 무사히 열 수 있었고, 도서지역의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고 웃을 수 있는 체육대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힘든 자리에서 가치를 찾지 못하면 결국 무너진다. 불합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합리성을 찾으려 애써야 한다. 그것이 초보 장학사였던 내가 배운 첫 번째 마음가짐이었다.
연수원에서 근무한 1년은 내게 ‘교육은 결국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새겨준 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연수 일정이 여러 차례 취소·연기되면서 준비 과정에서 수없이 좌절했지만, 덕분에 연수의 본질을 더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좋은 연수는 강사와 주최자가 아니라 ‘연수생의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사전 설문을 통해 교사들이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강사와 인터뷰하며 그 필요를 어떻게 채워줄지 논의했다. 강사 한 명을 섭외하기 위해 수십 통의 전화를 걸고, 자료집 한 장을 수정하기 위해 밤을 새웠지만, 연수 마지막 날 환하게 웃는 교사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 날개가 달리는 듯했다.
연수는 결국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빌려 그들의 성장을 돕는 일’이었다. 그래서 무겁고, 그래서 가치 있었다. 좋은 연수는 한 교사의 삶을 바꾸고, 한 교사가 바뀌면 수십 명의 아이들이 바뀐다. 그 시간 덕분에 ‘교육행정의 꽃은 결국 교사의 역량을 키우는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세번째 발령지는 북부교육청이었다. 이번엔 ‘교원 인사’를 맡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 인사업무는 나와는 거리가 먼 세계였다. 누가 하는지도 몰랐고, 시스템이 알아서 돌아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성과상여금 지급’ 업무를 처음 맡았을 때는 충격이었다. 시스템 자동 산출이 아니라, 학교에서 받은 자료를 엑셀로 직접 계산하고, 수십억 원의 예산을 품의 올려야 했다. 작은 실수 하나가 교사 한 사람의 급여와 명예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 수십 번이고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며칠 밤을 새운 끝에야 결재를 올릴 수 있었다.
휴·복직 발령, 신규교사 호봉 획정, 교사 전보, 표창 추천… 모든 업무가 ‘사람’을 다루는 일이었기에 한 글자, 한 숫자라도 틀려서는 안 됐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교감선생님들과 연락하며 상황을 확인하고, 특수한 사안이 발생하면 법령과 지침을 뒤져가며 길을 찾아야 했다. 때로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교사, 복직을 앞두고 눈물짓는 선생님과 통화하며 ‘행정이란 책임을 지는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교육행정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다리였다. 학교는 수업과 생활지도, 아이들의 미래라는 ‘앞단’으로 세워져 있지만, 뒤에서는 수많은 행정이 그 무게를 떠받치고 있었다. 장학사로서 내가 하는 일이 결국은 학교를 돕는 일이었기에, 그 힘든 시간도 버틸 수 있었다.
가장 치열했던 한 해는 시교육청 교육활동보호담당관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1월 발령, 신설 부서, 3월 말까지 반드시 출범시켜야 하는 교권보호위원회. 시간은 없고, 참고할 자료는 없고, 책임은 무겁기만 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조직·예산·인사 협의에 쫓겼다. 커피를 급하게 마시다 손등에 화상을 입은 날도 있었지만, 보고서를 다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지켜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결국 교사와 교육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로에서 시작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길을 개척한다는 건 때로 고통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행히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으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3월 28일, 지역교권보호위원회가 무사히 출범했다. 그날만큼은 교육을 위해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뿌듯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손등의 희미한 흉터를 볼 때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상처는 고통의 흔적이 아니라 ‘내가 버틴 시간의 증거’다.
이제 나는 학교로 돌아가 교감으로 새로운 길을 걸으려 한다. 마음속에는 아쉬움도, 후회도, 보람도 뒤섞여 있다. 6년 동안 수많은 갈등과 오해를 마주했고, 때로는 사람에게 상처받고 마음이 부서질 듯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조차도 ‘교육을 더 잘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교육행정은 차갑고 숨 막히는 책임을 요구하지만,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 보며 하는 일이었다. 현장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지키는 교사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정을 떠받치는 동료들 덕분에 나는 끝내 버틸 수 있었다.
교육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해, 사람의 마음으로 끝난다. 앞으로 교감으로서 다시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동료 교사들을 만날 때, 나는 경청하고 소통하는 교사가 되고 싶다. 누군가 힘든 길을 걸을 때, 내가 받았던 도움을 되돌려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고 싶다.
혹시 누군가 이 기록을 보고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고 조금이라도 버틸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6년의 시간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
2025. 8. 3. (일)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ps. 장학사 생활을 30개의 글로 기록할 계획이다. 우선은 10개의 글을 모아 「장학사 생존기」 1부를 완성하고자 한다. 2부와 3부에서는 교육행정 현장에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장학사 합격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팁을 담을 생각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사실은 큰 기쁨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임으로 다가온다. 구독자가 늘어나면서 부담도 커졌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솔직하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의 경험과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언젠가 이 글들이 누군가의 길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