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 모임 들러리 서기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언제부턴가 종종 아내 모임에 들러리를 서며 주말을 보낸다 한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라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얼마 전까지도 남편 친구 모임, 남편 직장 모임과 시댁 가족 모임에 아내가 들러리를 서곤 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말았다. 슬금슬금 세상이 변하더니 급기야 모계사회가 도래하고 말았다. 말투가 조금 거스를지 모르지만 이 현상을 결코 원망하거나 탄식할 생각이 없다. 예전 방식이 옳았다고 인정하지도 않거니와 다시는 과거로 되돌릴 방법이 없음을 진즉 간파했기 때문이다.
사내 아내의 한 모임은 수십 년간 이어져 어떤 집단보다도 결속력이 강하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모여 담소를 나눴다. 내용이야 감히 짐작하기 어렵지만, 주말로 부족하다 싶으면 주중에도 추가 만남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하거나 긴박한 내용일 게다. 가정 내 중대사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모계사회의 주인공들이 모여 몇 시간씩 집중 토론하는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사내는 지난주에도 아내 친구 모임에 들러리로 다녀왔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자연스레 행동하려 노력했다. 같은 처지인 다른 사내들도 현실에 적응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내들은 피차 할 말은 딱히 없지만 아내들 대화가 길어지다 보니 허접한 과거사까지 소환하며 시간을 버텼다. 그마저도 중간중간 말을 잃고 눈길은 허공을 헤매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사내가 이 지루함을 모면하기 위한 꾀를 냈다. 인근에 있는 한 사내 음악실로 몰려가 음주가무를 하자는 제안이다. 사내 모두는 솔깃했다. 하지만 사내들 꿈은 얼마 가지 못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제안을 한 사내가 아내에게 여차저차 구차하고도 길게 설명하고 허락을 구했지만, '귀찮아! 남자들끼리 가'라는 매몰찬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사내들끼리 이동한다면 사단이 날게 뻔하기에 없던 일로 했다. 어느 것 하나 사내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내 모두는 '오늘 중으로 끝나겠지'라는 간절함으로 다소곳하게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사내들은 초장에 술 한 잔으로 때우고 커피와 콜라로 대체했다. 모임이 끝나면 아내를 모시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들러리를 거부한 사내가 두 명이나 된다. 사내들로서는 이유를 가늠키 어려웠으나 옆 테이블 아내들 대화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한 사내는 그런 불편한 자리에 내가 왜 나가느냐 하는 저항 때문에 집에 떨구고 왔다 한다. 또 한 사내는 다음날 있을 집안 행사를 위해 집안을 치우느라 동행하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그게 잘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으론 이유가 그 정도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내는 들러리라도 자신을 데리고 나온 아내가 고마웠다.
사족)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다. 친구 본심은 잘 모르겠으나 이런 현상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남편 친구는 가능하고 아내 친구는 불가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만사가 편안해진다. 그리고 중년 이후 여성들은 친구들과의 소통이 삶을 지탱하는 큰 원동력이 된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