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가 잎보다 꽃을 먼저 흔든다

[시 읽기] 유희경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

by 이연미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


유희경


오래전, 나도 당신도 없고 그러니 어떤 단어도 추억할 수 없는 골목에서 모두 잠들어 아무도 깨우지 않게 생활이 돌아눕는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에서 아무도 태어나지 않아 우는 것도 없는 그 가만한 새벽에, 여태 어린 부부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을 것이다 고요가 잎보다 꽃을 먼저 흔든다


- 시집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 2017)




[단상]

시간을 거슬러 나의 탄생 이전으로 가본다면 이런 풍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느릅나무가 있는 골목 어귀 어느 가정집엔 아직은 '가족'이라는 단어 위로 차곡차곡 추억을 쌓기 전의 “여태 어린 부부”가 있었을 것이다. 나와 나의 형제가 태어나 울음으로 새벽을 채우는 나날이 계속되기 전이었을 그때, 신혼의 부모님은 “가만한” 생활을 보내셨을 테다.


“고요가 잎보다 꽃을 먼저 흔”드는 밤, 느릅나무에 꽃잎 지고 나면 열매가 맺히듯 서로를 끌어안은 부부에게도 생명이 잉태되었을까? 그렇다면 이 순간은 나의 탄생의 서막일까.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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