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 옥타비오 파스 '글쓰기'
- 옥타비오 파스
고즈넉한 시간
붓이 종이에 글을 쓸 때,
누가 붓을 움직이는가?
내 대신 글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는가?
입술과 몽상으로 얼룩진 해변,
말없는 언덕, 좁다란 항구,
영원히 잊기 위해 세상에서 돌아선 등허리.
누군가 내 안에서 글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헤아리고
잠시 멈춰 망설이고
푸른 바다일까 파아란 산언덕일까 생각하며.
싸늘한 불꽃으로
내가 글쓰고 있는 것을 응시하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꽃.
그러나 이 재판관 역시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함은 스스로를 벌하는 일.
기실 그 글은 누구에게 쓰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부르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서 쓴다.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잊는다.
마침내 무엇인가 살아남은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금 내 자신이 된다.
[단상]
시인의 말처럼 내 안에 글 쓰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 손을 움직여 타이핑하고 단어와 문장을 골라준다면 참 좋겠다. ‘푸른 바다’와 ‘파아란 산언덕’ 사이에서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나 대신 적확한 표현을 헤아려준다면 더욱 고맙겠다. 그러나 이 ‘재판관’이 정의에 사로잡혀 너무 가혹하게 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 글 중에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할 테니 말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시인은 ‘기실 그 글은 누구에게 쓰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위해서 쓴다’고 말한다. 글을 쓰다 보면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잊는다’라고도 덧붙인다. 결국 내 안에서 글 쓰는 사람(재판관)과 나(희생양)는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태워지지 않고 어렵게 살아남은 글도 다시금 나 자신이 된다. 글을 쓰는 행위는 이렇게 끊임없는 자아 성찰과 비판을 통해 나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일이다.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