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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29. 2021

그 시절의 나와 당신을 떠올리며

백수린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수린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문학동네, 2020) 속 작품들은 한 편 한 편이 작은 조약돌 같다. 이야기를 읽는 순간, 현재의 삶이라는 잔잔한 수면에 무언가가 툭-하고 던져져 동그란 파문을 일으키며 과거의 그 시절로 기억의 반경을 넓혀간다. <시간의 궤적>과 <흑설탕 캔디>를 읽으면서는 낯설고 두려웠지만 그만큼 자유롭기도 했던 유학 시절이 생각났고, <여름의 빌라>에선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안겨주던 이국적인 여행지와 여행지에서 만나 인연을 쌓은 사람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아주 잠깐 동안에>와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는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을 막 시작했던 시기가, <고요한 사건>과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은 흐릿해질지언정 절대 지워지진 않을 학창 시절의 기억이 소환됐다. 그 속에는 한때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맹목적인 신뢰를 쌓았지만 끝내 연결이 끊어진 관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는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이 교차하면서 작지만 특징적인 매듭이 지어지는 순간을 잘 포착해냈다. 이때 중요한 건 함께 보낸 시간의 양이나 교감의 깊이가 아니다. ‘고작 오 년 사흘’을 함께 했던 <여름의 빌라>의 주아와 베레나의 관계도, ‘사전을 사이에 둔 대화’만 가능했던 <흑설탕 캔디>의 할머니와 브뤼니에 씨의 연애도 의미가 있는 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남긴 그 단단한 흔적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타인과 얽혔던 그 마디마디를 들여다본다. 더이상 겹쳐지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그녀를 떠올리고 동시에 자신의 삶도 되돌아본다.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시간의 궤적>, p.39)     


그렇다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은 회한과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그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회한(remorse)’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고 썼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의 추억은 ‘흑설탕 캔디’처럼, 혹은 ‘각설탕’처럼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비감을 뒷맛으로 남긴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고요한 사건>, p.104)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p.1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집의 소설이 빛나는 건 사람과 세계에 대한 일말의 희망과 기대를 절대 놓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간 엇갈리고 마는 관계라 해도 다른 이와의 교류는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시간의 궤적>, p.12)과 세월의 폭력 앞에 무너져내려도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여름의 빌라>, p.68)이라는 생각, 그리고 평생 동안 인생에 배신을 당했더라도 어떤 이를 바라보며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흑설탕 캔디>, p.199) 순간들이 그렇다. 그래서 나와 당신, 세계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도, 우리는 여전히 어떤 이해나 공감, 연대를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도우면서 사는 곳이란 걸 아는 사람으로 네가 크면 좋겠어.” (...) “너는 그런 세상을 이루는 작은 일부란 걸 잊지 말렴.” (<폭설>, p.116)     


백수린 <<여름의 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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