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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Aug 21. 2024

자전거, 좋아하세요? (2)

[취미 부자와 살고 있습니다] 2편 '자전거'

 

   남편이 말한 국토 종주 길의 업힐(uphill) 두 개는 알고 보니 백두대간의 이화령(해발고도 548m)과 소조령(해발고도 362m)이었다(“여보세요, 이건 ‘산’ 아닌가요?”). 그리고 종주를 통틀어 업힐 두 개만 넘으면 된다고 했지만, 실상은 매일같이 두세 개의 언덕을 기본으로 넘어야 했다. ‘아이유 고개’(정식 이름은 ‘암사 고개’인데 삼단 오르막이라고 라이더들이 이렇게 부른다)도 낑낑대며 오르는 주제에 종주라니, 역시 무지해서 무모하게 덤빈 거였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실감했다.     




   어쨌든 시작은 했으니 끝을 봐야 했다. 라이딩은 아침 8시 전후에 시작했고 오후 5시 이전에 마쳤다. 시골 자전거길은 해가 지고 나면 금방 어둑어둑해졌기 때문에 그전에 멈춰 근처에서 숙박을 잡았다. 짐을 최소화해서 떠났기에 아무리 피곤해도 저녁마다 자전거 옷을 빨아 널어야 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쓰러져 잠들면 다음 날 아침 다시 자전거에 오르는 일이 반복됐다. 이전에는 연달아 자전거를 탄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이튿날부터 온갖 통증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초반엔 안장통이 특히 심했고(둘째 날 아무 생각 없이 안장에 앉았다가 바로 벌떡 일어서야 했다) 이후엔 목, 손목, 무릎 등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손목 보호대와 파스, 파워젤(에너지보충제)은 어느새 필수용품이 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편의점에 멈춰 물과 에너지를 보충했는데(라이더들 용어로 ‘보급’이라고 한다), 이때 초콜릿바나 연양갱 등을 사서 비상용으로 뒷주머니에 끼운 채 라이딩을 했다. 연양갱을 요즘 누가 먹나 했더니 라이더들이 긴급 보급품(탄수화물+당)으로 애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번은 내가 삼각김밥을 먹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대뜸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삼각김밥을 두 손으로 소중하다는 듯 쥐고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불쌍해 보였다고…. 하긴 그때 남편이 다음 코스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내 귀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기억나는 건, 이때의 삼각김밥이 인생 최고의 맛이었다는 사실이다.  

   

   남편이 사전에 경고했던 이화령과 소조령을 넘은 날은 확실히 고비였다. 구불구불한 오르막이 끝도 없이 이어져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너무나 막막했다. 나는 땅만 보면서 속으로 오른발에 ‘천천히’, 왼발에 ‘꾸준히’를 외우며 페달을 밟았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끌바’(자전거에서 내려서 핸들 바를 잡고 끄는 것)는 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남편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옆에서 달리며 응원을 해줬는데, 너무 힘드니까 그 해맑음도 어쩐지 반갑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하루에 100km 남짓을 달려 6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결국 모든 게 그렇듯 끝이 있긴 있었다. 종착지에서 사진도 남기고 기쁨의 세리머니도 했지만, 막상 실감이 나지 않았고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 같다. 완주의 뿌듯함과 성취감은 이후에 집으로 인증서와 인증 메달이 오고 나서야 찾아왔다. 책장에 고이 모셔둔 인증서와 메달, 볼 때마다 당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국토 종주를 하고 나니 이제는 뭐든 불가능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라이딩은 해외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본 오키나와, 그다음엔 대만 가오슝이었다. 오키나와에서는 무더위와 싸웠고(알고 보니 8월 말엔 오키나와 사람들도 바깥 활동을 하지 않는다더라) 가오슝에서는 오토바이 매연에 시달렸지만(자전거는 오토바이가 달리는 길을 공유한다), 그래도 자전거와 함께했기에 특별한 여행이었다. 

     

   해외에도 커스터마이징 된 자신의 자전거를 가져가야 한다는 남편의 신념으로, 우리의 여행엔 자전거를 분해해서 실은 커다란 하드케이스 두 개가 함께 했다. 공항이든 렌터카 회사든 가는 곳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진지하게 악기 하프가 들어있냐고 묻기도 했다(생긴 게 하프 케이스와 비슷하긴 하다). 번거롭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해외 곳곳을 함께 한 내 자전거’라는 애착이 더욱 강해지게 된 계기가 된 것도 같다. 요즘도 우리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의 해외 라이딩을 기약하며 행복한 상상에 빠지곤 한다.     


(계속 이어집니다.)


국토 종주 인증서와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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