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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08. 2020

불쑥, 이라는 말이 좋아

[시 읽기] 박소란 '불쑥'



불쑥   



불쑥, 이라는 말이 좋아   

  

불쑥 오는 버스에 불쑥 올라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 일이 좋아     


나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텐데 불쑥 우리는 사랑할 텐데     


고단을 가득 태운 버스가 우리를 창밖으로 내팽개친대도 그리고 모른 체 달려간대도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이봐, 이걸 보라구, 여기 불쑥이란 게 있다구

아하, 그렇군!

걱정 없을 텐데     


이제부터 나는 불쑥이 될게,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일 텐데

어이 불쑥, 반색하며 불러줄 텐데     


그러면 대답할 텐데 응, 하고

불쑥이 대신     


불쑥은 내가 될 텐데

나는 불쑥 뒤에 숨어 숨바꼭질처럼 살 텐데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불쑥 왔다 불쑥 갈 텐데 술래도 모르게 나는, 멀리 저 멀리 갈 수 있을 텐데          



- 박소란,『한 사람의 닫힌 문』 p.142-143




[단상]

시인은 ‘불쑥’이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불쑥.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불쑥’은 ‘갑자기 쑥 나타나거나 생기거나 하는 모양, 갑자기 마음이 생기거나 생각이 떠오르는 모양’을 뜻한다. 즉, ‘불쑥’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고 우연이고 순간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불쑥’은 기분 좋은 놀라움이 되고 반가움이 되고 삶의 긍정이 된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불쑥’과 동일시하며 온갖 근심 걱정도 농담처럼 가벼이 여기는 초월적 태도를 보여준다. 시인의 말처럼 ‘불쑥이’가 되면 세상만사 별일 아니라는 듯 깔깔 웃어넘길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시의 어미 ‘~텐데’가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할 터인데’라는 추측이지만, 왠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라는 반대되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고 나라는 존재도 ‘불쑥이’가 되기에는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의 바람처럼 ‘멀리 저 멀리’ 떠나가지도 못하고 현실에 얽매인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소란,『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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