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해지고 확대되는 부모의 역할변화에 즈음하여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느껴온 세상은 부모로부터 보고 듣고 느껴온 세상의 프레임 안에 있었습니다. 성장과 과정의 진보에 있어서 선험자의 그것을 뛰어넘기 어려운 관계의 최상위레벨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을 회사에서도 종종 경험하기도 하죠. 새로 합류한 이들의 의견과 생각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존 멤버들의 존재 또한 부모의 관계와 매우 유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았던 이유들을 하나둘 찾아본다면 꽤 높은 비율로 선험자들의 프레임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하나요, 당연히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경험이 우리들의 그것에 비해 오래 묵었기 때문이 두 번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그들의 현재 삶이 내가 동경하거나 나보다 나아 보인다면 더더욱 그들의 언행에 나는 이곳저곳 깊숙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죠.
그렇게 살아가던 와중에 오늘 나의 두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어느 순간 나와 아내가 경험한 세상에 대해 들려주고 무엇이 더 '옳은' 삶이 될 것인지 벌써부터 재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요. 지나 온 시간들이 때론 행복이었고 많은 순간이 고난이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나의 뜻대로 삶을 경험해 보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장고해 본 적도 있었으나 이미 난 대한민국의 그저 평범한 '부모'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만큼 누리고 사는 것도 부모의 덕이고 더 나은 길을 택하지 못했음도 부모의 탓이라 할 수 있겠죠. 강하게 나의 의견을 밀고 나가지 않았던 자신을 탓하기보다 핑계의 대상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어른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이 역시도 내가 기대한 삶은 아니었기에 마흔 중반의 나는 이후에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지,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방향을 안내해야 하는 것인지 적잖은 고민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룰과 문화 속에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대가로, 가장 귀중하고 유일한 우리들의 자산일 시간을 내어준 대가로 받는 급여로 우리는 생활을 할 수 있고 가족을 지켜냅니다. 그러기 위해 나의 생각과, 가치와, 기준과, 사람과, 그리고 시간을 내려놓습니다. 적당히 벌고 적당히 살아가며 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나를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기대치를 낮추고 욕심을 버리는 것이죠. 기대치라 함은 내 삶에 대한 기대치, 그러니까 사회적 지위와 연봉 등의 직업조건에 대한 것일 테고 욕심은 식욕, 물욕과 같은 내가 '채우고자' 덤벼들게 되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 과정과 단계별 우수한 기준을 좇는 삶이 '옳은' 것이라 인지하는 시간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시간들의 기준은 충분히 자신이 세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최상위의 가치를 따르는 인생을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합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공간을 잠식하고 있는 수많은 책과 옷가지, 물건들을 정리합니다. 갖고자 하는 욕심을 줄이게 되면 적게 갖고 있어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집니다. 최소한 누군가와의 비교가 아닌 자신의 기준을 맞추는 인생을 살게 될 테니 말이죠. 얘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저는 제가 원했던 삶이 아니었던 시간들을 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모순된 부모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쉽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제 나이가 되었을 때, 부모가 열어 둔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에 대해 꿈을 갖고 달려갈 수 있었음을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나 자신 또한 나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나다운 인생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길을 홀로 가야 할 순간들이 찾아올 텐데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준비하여 늦지 않은 시기에 '나다움'을 우리에게도,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