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중요한가
퇴사일이 되었다.
괜찮을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쳤다.
12월에 인상될 예정인 연봉 그리고 스톡옵션을 생각하면 '이 무슨 미친 짓을 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감정의 동요는 지난 시간 동안 함께한 이들에게 향해 있었다. 미안한 감정이었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의 죄책감은 더 커졌다. 선택을 존중한다며 고개 숙인 팀원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남은 사람은, 그들의 방식대로 걸어 나가야 한다. 선택은 내가 한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은 이제 온전히 나의 것이며 그에 대한 영향은 팀원이 아닌 나의 가족이 받을 차례가 되었다. 겁먹을 상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 있게 뒷짐 지고만 있을 수도 없다. 따뜻한 오늘, 한파가 몰아칠 내일을 위한 준비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사실 작년하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모든 보상의 총액으로 치면 2천만 원의 인상이었고 이로 인해 불가능했던 꿈들이 현실이 되는 수준은 아닐 테니 말이다. 예정되어 있는 안정적인 소득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한 것에 대한 평가는 1~2년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지금 깨닫고 있는 것은, 그간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벼락치기로 만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일에는 적정한 때가 있고 아이들의 성장은 나의 분주함을 배려하여 기다리지 않는다. 지난 2년간 내가 놓친 우리 가족의 잊지 못할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아쉽고 서럽다 해도 돌아갈 수가 없다. 아플 때 옆에서 지켜주고 싶고 그래야 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인데, 밖에서의 인정이 내 눈엔 더 크게 보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머지는 아내의 몫이었다.
이제서라도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퇴사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나는 좀 더 나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고, 그 울타리 안에 가족과의 시간이 가장 큰 범위에 들어와 있으며, 이는 당장 이 보상 패키지를 수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현상이 아닌 본질에 접근하는 일을 좀 더 잘 해낼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비는 언젠가 그치고 싹이 나며 작열하는 태양에 시들기도, 더욱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다 찬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매서운 한파를 견딜 채비를 해야 한다. 자연의 순리가 인간사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결국 자의와는 무관하게 누군가에 의해 밝히거나 뽑힐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더디 가더라도 나의 길을 가야 하고, 미숙하지만 일단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 이미 그냥저냥 지내온 시간이 대체 얼마란 말인가.
연봉 273,000,000원이 내 삶에서 제시할 수 있는 방향은 그저 어제와 같은 패턴의 인생이다. 동일한 조건에서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하는 단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개인의 판단은 가장 후순위로 밀리고, 조직의 논리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래, 그래서 난 여기에서 멈추기로 한 것이다.
세상 가장 위험해 보이는 선택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