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보다 애틋한 아내의 이야기
누군가는 궁상이라 부를 것이고, 어떤 이는 아내의 옷장을 열어볼 수도 있겠다.
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던 이유는, 주제의 민망함이 아닌 내 마음에 맺히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아내는 결혼 전 입던 잠옷과 속옷들을 여전히 입는다. 10년 동안 말이다. 물론 알고 있다. 그게 뭐 대수냐고. 우리 엄마는 20년째 그대로 입고 있다는 말을 던질지 모르겠다. 아내의 그것이 내게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내가 했던 행위와의 상대성 때문인데 단지 소비의 패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아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의 소비를 문제 삼지 않았다. 비밀도 없거니와 급여가 들어오는 통장과 공인인증서, OTP카드 등이 공유되어 있는 상황에서 내가 숨길 수 있는 여지는 제로에 가깝다. 어디에서 얼마를 왜 결제했는지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였을까, 아내는 내가 뭔가를 샀다고 혹은 말없이 사버렸다고 타박한 적이 없었다. 이미 알고 속으로 삭인 적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외벌이 남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덕분에 난 내가 필요한 것에 대해, 갖고 싶은 것을 갖는 것에 대해 큰 고민이 없었다. 그냥 샀다. 그래, 충분한 소득이 있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긴 마흔넷 내 여동생도 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결혼 8주년이던 해에 나의 집이 생겼지만, 없던 빚도 생겼다. 인생 첫 대출이었다.
당장에 네 식구 생활비 수준의 이자가 매달 지출되어야 했다. 그마저도 난 걱정이 없었다. 낙관적으로 '난 잘될 거야'라는 생각이라기보다, 적정한 시점에 전세를 주고 해당 시점의 잔여 대출금을 전액 상환하여 운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 집에 그렇게 많은 정이 생길 거라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값비싼 투자의 대상 정도로 생각했다. 난 대출을 내어 집을 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몇 회전(물론 가능하다는 시나리오임) 계약을 진행하다 또 좋은 때에 매도하는 플랜도 구상했다. 나의 연봉 인상은 대출 이자가 오르는 속도와 범위보다 빠르고 넓을 수 있고, 부수적인 수입의 발생 또한 지금의 상황보다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물론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어찌 될지 모르고 뚜렷한 플랜 A, B, C가 준비되어 있다 해도 해당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그때도, 지금도 난 여전히 긍정적이다.
어찌 되었건, 요지는 난 내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때그때 구입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품목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러닝 관련 용품들. 운동복, 러닝화, 트레일러닝화, GPS시계 등 저가의 상품은 아니다. 그렇다고 장비발에 미쳐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달리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분들에 비해선 지출의 규모는 꽤 있는 편이었다. 난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아내의 오래되어 해진 속옷들을 보게 된 난 물었다.
아니 새 속옷은 왜 안 사는 거야,라고. 그게 얼마나 한다고.
아직 입을만해. 그리고 누구 보여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나는 보지 않냐는 말을 차마 하진 못 했다. 말했다 한들, 그게 아내 기준의 입을만한 속옷을 버릴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뭔가가 내 머리를 훅 치고 지나갔다.
아내는 2019년 은행을 퇴직했다. 어렵게 입행한 첫 직장을 그렇게 나간 이유는 남편의 권유와 두 아이의 양육이었다. 아이들 옆엔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나 아내나 동일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이유가 가장 컸다. 엄마라는 존재가 옆에 있음으로 인해 안정된 정서가 당시 얼마나 중요했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일에 대한 욕심은 여전하다. 직장에 대한 의미보다 '일'의 의미를 아는 여자였다. 그런 점도 난 좋았다. 그래서 생활력도 강했고 좀체 쉬지를 않는 사람이었다. 집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을 못 견뎌했지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어도 어디든 가서 시답잖은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스 라테 한잔이면 족한 사람이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이후로 아내의 쇼핑은 멈췄다. 온라인으로 생필품을 사는 것 외에 아내가 지출을 하는 경우는 동네 학부모들을 만나 밖에서 커피 한잔 하는 것이 전부였다. 생필품도 주로 아이들의 것이었다. 간혹 출근할 때 입어야 할, 계절에 맞는 내 옷을 사는 것이 전부였다.
아내는 어쩌다 연말에 대규모 할인행사를 할 때 1~2만 원 하는 패딩을 온라인으로 득템 하며 행복해했다. 그 돈으로 패딩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타임딜이라고 하는 그것을 새벽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구매하는 노력에 놀랐다. 난 내가 버는 거라며 맘 편히 술사고 밥사고 할 때, 아내는 남편이 외벌이로 고생하는 거라 생각하며 소비를 멈춰가고 가계 경제를 돌보고 있었다. 혼자서 말이다.
생각해 보면 비단 나의 아내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엄마들도 그러했다.
그렇게 알뜰살뜰 모아 살림을 꾸렸을 것이다. 자식들 교육도 시키고 좋은 옷과 가방도 사주고 내 집을 마련했을 것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그저 고맙다는 말로는 이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 엄마의 애씀 덕분에 난 잘 자랐고 이만큼 살 수 있는 영양가 있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고 있다.
아내의 미니멀리즘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은 커가며 부모의 거울이 되어간다. 생각하는 것, 말하고 행동하는 것, 돈을 쓰는 것, 물건을 사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학습해 나간다. 매 순간 모범적인 부모였으면 싶지만, 그것은 내게 성역에 도달하는 것만큼이나 불가한 일이다. 적어도 올바른 행동을 하는 기준을 가진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조건 지출을 줄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가치 있는 소비, 가족에 대한 책임, 자녀에 대한 책임에 대한 중요도를 고려하여 지갑을 여는 것이 지혜로운 소비가 아닐까. 몇 해 전부터 이 주제에 대한 글을 한 번쯤은 쓰고 싶었는데 큰 용기를 내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괜찮은 속옷 몇 벌 정도는 구입했으면 좋겠다. 가끔은 부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소비도 의미 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