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진실
2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규모의 회사였다.
임원(C-Level)은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었는데, 그나마도 한 명은 내가 입사한 후 자신의 사업개시를 이유로 퇴사했다. 나를 채용한 사람의 퇴직을 입사 2주 차가 채 안되어 알게 된 셈인데,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았다. 퇴사의 변을 모두에게, 그것도 이제 갓 입사한 임원에게 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럴 의무도 없는 것이고. 거기까진 좋았다.
몇 개월 후, 다른 임원 한 명이 전체회의에서 퇴사소식을 알렸다.
이번에도 난 전혀 알지 못했다.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이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어 보였고, 이미 얼마 전부터 CEO와는 퇴사와 그 이후의 계획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영진도 한 팀이라고 강조하던 대표의 말이 당시의 상황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이 조직을, 이 사람을, 이 대표가 이끌어가는 회사를, 나는 믿을 수 있을까.'
그렇게 나의 입사 후 짧은 시간 동안 두 명의 임원이 퇴사를 했고, 결국 셋이 남았다.
얼마간은 지난 일들에 대한 생각을 의도적으로 묻어두었다. 그러지 않으면 한 팀으로서의 매니지먼트 조직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업무에 있어서의 신뢰는 필수가 아니던가. 다시 한번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실수였다. 결과적으로 비겁한 침묵이었고, 그때를 떠올리면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보다 나에 대한 실망과 아쉬움이 더 크다.
연말평가 때 대표와 미팅을 하며 부탁을 했다.
어떤 팀의 일이건, 회사에 관한 일이면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알 필요가 있으니 말해달라고. 대표는 이런 말이 어색했던 모양인지, '당신 조직의 일들로 많이 정신없고 바쁠 터라 일부러 알리지 않았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했다. 그럼에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명확해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회사 돌아가는 일에 있어서 내가 완벽히 한 팀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아니란 사실이 말이다.
스타트업은 그 특성상 직원의 입퇴사가 잦다.
인사팀 그 안에서도 채용팀은 늘 분주하다. 직원의 재직기간이 짧아질수록 해당팀과의 마찰도 커졌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뽑았는데, 그 팀에서 제대로 케어를 못해주고 있다고 했다. 리텐션이 낮은 팀은 채용팀과의 협업을 늘 괴로워했다. 문제의 원인 분석에 성공해도, 서로에 대한 신뢰는 부재했다. 솔루션이 도출되어도 실행과정에선 늘 불필요하게 목소리들이 커졌다. 발전적 형태의 논쟁은 사라지고 감정의 분출만이 회의실을 채우는 날이 많아졌다. 채용팀의 고됨은 입사를 원하는 후보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최종합격 이후에 입사를 포기하는 후보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한때 업무적 동지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마음에 금이가고, 우리 조직에서 당신 조직으로 변해갔다.
해야 하는 일만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야근을 하게 되는 멤버가 고정화되었다. 팀과 조직은 쪼개지는 중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한 무리의 대화가 다른 무리와의 대화와 섞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들이 생겨났다. 권리를 주장은 끝이 없었고 책무를 다하는 일은 국소적이고 제한적이었다.
그러한 환경을 바꿔보고자 내가 나서겠노라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실적이 우선이었고 매출이 먼저였다. 결국 그걸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이고, 여기 구성원인데 일단 숫자를 맞추면 그만인 것이었다. 한두 번 이런 일에 대해 생각을 들어보고자 중간관리자 들과 퇴근 후 술자리를 가졌는데, 이내 나 역시 포기했다.
그렇게 모이니 서너 시간 동안 하는 일이라곤, 조직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들 뿐이었다.
구성원 모두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조직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조직에 대한 믿음,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구성원이 100명이라면 100명 모두에 대해 신뢰를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다수의 동료에 대한 믿음은 필요하다. 얘도 못 믿고, 쟤도 못 믿겠고..라는 생각이 든다면 솔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 맞는지 말이다.
상선약수의 태도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상호신뢰의 크기가 커질수록 우리는 조직 내에서 보다 유연해질 수 있다. 상대의 주장과 이야기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오래 지속되고 유지되며 성장하는 조직의 문화를 만들어내겠다는 경영진의 강한 의지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경영에는 매 순간 어려움이 따른다. 위기에 강한 조직은 실적을 잘 내는 조직이 아니다. 사람의 중요성을 아는 조직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내가 갖고 있는 못한 능력으로 해내는 다양한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조직이다. 설령 회사의 어려운 상황으로 모두가 괴로워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조직이다. 몇 번의 위험에서 다수의 구성원이 어떤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하는지를 보면 그 조직의 건강한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올바른 기여를 향할 수 있도록, 스스로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러지 않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태도를 갖고 일하는 조직이라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큰 걱정 없이 오늘의 일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겠으나, 하루아침에 마음먹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중이라면, 적어도 그런 우리가 한 기업에서 적지 않은 책임과 역할을 맡고 있다면, 내가 지금 구성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조직은 수많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어떤 역할을 하고 있든 사람에 대한 올바른 마음을 가진 이들이 진짜 인재들이 가득한 조직을 상상하고 만들어 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해당기업의 사진은 본 글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