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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이 없다

by Johnstory

좋은 곳, 좋은 자리,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곳에서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끝이 있다. 언젠가 시작했을 그 일들은 어떤 형태로든 끝을 보게 된다.

그 상황 안에 머무를 때에 알지 못했던, 그래서 영원일 것만 같았던 사실들이 분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이 급변하기 전후의 특정 경계점을 기준으로 마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같은 시간, 같은 오늘인데 1분 전과 후의 마음이 달라진다. 새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과 끝없이 추락하는 곳에서 절망을 오랜 시간 마주한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의 풍요와 여유도, 고통과 두려움도, 기쁨과 행복도 그 시절의 영원은 없다. 단지 잠깐의 기억이 오래 남을 뿐. 그런 의미에서 나의 기억력이 좋다면 영원히 추억을 안고 살아갈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 추억의 밀도와 농도 역시 시간의 흐름에 희석될 테니 '희미해져 가는 영원'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깨달음 덕에 우리는 좀 더 가벼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오늘의 미숙함도, 어설픔도, 슬픔도, 좌절도, 아픔도, 상처도, 두려움도 영원하지 않다. 젊은은 시간이라는 무기가 있고 중년은 경험이라는 키를 갖고 있으며 노년은 열매 맺음을 지켜보는 너그러움이 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한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대게 많은 것들이 잊힌다. 타인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 관심이 없다. 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다. 그러니 타인의 시선과 대화하려니 오지랖 대신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 안에서의 목소리가 언제까지 내 귀에 들려올지 모를 일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꺼져가는 불빛을 안고 산다. 언제 꺼질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람이 닿지 못하게 손과 몸으로 막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야 한다. 타인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자신만의 불빛을 꺼지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영원하지 않은 인생이기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스스로 망설이고 주저하는데 쓰는 시간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다면 누구든 한숨이 나올 지경일 것이다. 그중 단연 나는 그 선봉에 있을 것이다. 교복을 벗던 시절 이후부터 지금까지 고민과 생각과 걱정과 두려움에 갇혀있던 순간들을 모아 영상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영상의 제목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생각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만큼 살다 보니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여 너희들에게 전한다는 의미의 생각에서였다. 무엇이 성공한 인생인가에 대한 진부한 대답을 한동안 안고 살았다. 그 자체로 자기검열하여 비난할 일은 아니겠으나 이제는 좀 더 너그러운 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때가 왔다. 성공한 인생이란, 해야 했던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남김없이 수행하는 시간들로 채워진 인생이 아닐까. 과거와 오늘과 미래의 모든 일들이 영원할 것처럼 살았던 시간들이 아쉽다. 아주 작은 실수에도 전전긍긍하고, 직장에서 불필요하게 눈치를 보고, 꼭 해야 하는 말들이 있었는데 내 의견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끝나던 회의 등. 이런 시간들이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남아있다. 왜 그랬을까.



내 모든 말과 행동이 영원불멸한 암석위에 새겨지는 것 마냥 살았다.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오점임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랬으면서도 오점만 남았다. 어차피 이렇게 오점 투성이인 시간들이 가득한 하루를 보낼 거라면, 내가 의도하고 계획하고 마음에 차는 일들로 인한 오점이 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좀 더 솔직해보자면, 나보단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과도하게 의식했기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내가 원했던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힘들 때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탓했다. 장손이니 장남이니, 요즘 같은 상황에선 어색한 핑계들이 내겐 적중했었다. 이마저도 나의 선택이었다. 내가 원하는 길을 가지 않은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리곤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 다들 이렇게 살아.'



걷어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편견이었다. 확증편향이라는 오류로 소모한 나의 삼십 대가 한동안 그립기도 했다. 명상의 효과인지 러닝의 실익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시간에 대한 그리움대신 다가올 오십 대의 평온함을 기대하기로 했다. 요즘 새벽에 달리면서 생각하는 한 가지가 바로 이거다. 내 오십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또 새로운 이들을 만나 좀 더 나다운 오십을 살고 있는 나를 떠올린다. 그 희망과 오늘의 평범함의 경계에 서있다. 그래서 오늘의 머무름이(정체라고 쓰려다 머무르는 중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좀 더 나를 따뜻하게 대하는 표현이다.) 전환을 맞이하게 될 어느 날 순간의 감정으론 구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생각보다 길었던 이 시간에 얻게 된 하나둘 삶의 지혜가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곳에 머무를 수 있어 좋았다. 후회되더라도 살아갈 수 있어 좋았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긴 시간이라도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순간들의 합이라 좋았다.



학부 시절에 알지 못했던 교훈의 의미가, 마흔 중반이 되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VERITAS VOS LIBERABIT


The Truth Will Make You Free.

-John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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