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몬 Jun 12. 2019

에세이와 시9

퇴근길 상대 시간, 빗방울과의 인연

퇴근길에 나섰다.


사람, 우산, 비, 나무, 유리창을 소재로 찍은 사진.


비가 갑자기 내린다. 마침 준비한 우산도 없어 그냥 길을 나선다. 전철 입구로 뛰어갔지만 비 사이로 피해 갈 순 없는 상황. 결국에는 한 방울을 맞고야 말았다. 퇴근 시각 19시. 영국 그리니치자오선 지역은 오전 10시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GMT 09시10분. 한국시각 저녁 6시 10분 퇴근시.


한국에 살면서 세계표준시각의 영점시각대(GMT)를 항상 떠올리는 습벽이 있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공간을 지배한다고 볼 때, 영국은 세계표준시의 영점 척도를 가진 나라라 국력이 미래에도 강할 것이라 본다. 시간이 없는 공간은 상상할 수 없기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으로 본다.

기상청에서 근무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의 기상 표준시도 영국 그리니치 시각 00z(주르)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해가 떠는 나라가 아니라, 지는 나라가 시간의 기준 국가라는 게 매우 역설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래서 영국이 전쟁을 일으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19세기에 실제로도 그러했고, 연방으로 따지면 지금도 그렇다.


여하튼 지금 내가 비를 맞은 시각은 19시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의 나라 기준으로 오전 10시에 맞은 셈이다. 비를 맞은 시각도 관측자에 따라 달라지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지하철은 만원이다. 상대습도는 적어도 65퍼센트가 넘을 듯하다. 지하철에서 무료한 내용의 글쓰기보다 뭔가 재밌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오래전부터 염두에 둔 생각이 떠오른다.



빗방울이 빛방울로 바뀌는 순간.


회사에서 집까지 그 긴 여정을 지하철에서 서서 가는 경우가 많다. 거의 은하철도 입석 수준이다. 지하철을 탔을 경우, 비오는 날과 맑은 날에 각각 앉아서 갈 확률은 차이가 얼마나 까, 라는 생각도 해볼 정도였다. 론 객차 번호를 10-5로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그런데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수백 피트 상공에서 생긴 방울이 종단속도로 나의 머리에 떨어졌다. 그 탓에 빗방울의 수를 단위시간당 계산해 보고, 언제 떨어진 것인지 갑자기 알고 싶었다. 계산을 하려면, 먼저 가설을 세워 모델을 최대한 간단히 설정해야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홍대 앞이다. 앞으로 남은 역 수가 반 밖에 안 남았다.



물의 표면장력으로 빗방울이 크라운을 이룬 모습.


가설


첫째, 지구는 자전하지 않는 완전 구형체이다(반지름 6400km)
둘째, 지구의 표면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크기와 종단 속도는 모두 일정하다. 종단속도 4m/s, 지름 5mm=0.005m. 이것은 실제 평균수치이다.
셋째, 비는 단층의 하층운에서 일제히 균일하게 내린다.
넷째, 운고는 330피트(100m)로 한다.
* 군 생활을 기상대에서 근무했던 관계로 퇴근길에 보았던 구름의 높이는 육안으로 관측했다.

생각해 보니, 더 이상 세울 가설은 없을 듯하다. 이제부터 계산해 보기로 한다(원주율은 편의상 3.14로 한다)

지하철에 앉아 핸드폰 계산기로 이리저리 수치를 두드려 보니, 빗방울의 수는 약 2600경이다. 운고는 지구 반지름에 비해 무시할 정도로 작아, 근사치는 되겠다 싶다.  따라서


오늘 퇴근길에 그 빗방울에 맞았던 확률은 약 2600경분의 1이었던 셈. ​빗방울이 최초 낙하한 시점부터 내가 얼마만에 맞았는지도 두드려 보니, 25초 뒤에 맞았다. 퇴근길에 난 전 세계의 하늘에서 25초 전에 떨어진 그 빗방울과 약 2600경분의 1의 확률로 맞았다는 결론이다.


지하철 퇴근길이 길다 보니 사람도 진화하나 보다. 지하철에 앉아 내가 이런 계산도 해보기는 처음이다. 퇴근길 운전대를 잡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 진화는 역경에서 시작되는가?

우리는 비오는 날이면 로또 1등 당첨 확률(814만 5060분의 1, 한국 기준)이나 소행성 충돌로 사람이 죽을 확률(7481만 7414분의 1)보다 낮은, 빗방울과의 충돌을 일상적으로 경험하지만, 다른 사람이 맞은 빗방울이 내가 맞은 빗방울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중한 인연들을 너무도 간과하고 산다. 주위를 둘러보고 소중한 인연을 간과하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고찰해야 할 때다.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지역의 추첨방식과 공의 수마다 다르다.
약 6500만 년 전 공룡을 멸종시켰던 소행성 충돌(NASA).


그런 시간의 상대성과 빗방울을 소재로 내적 심경을  20세기 초현실주의의 천재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도 같이 잘 표현한 시가 있어 소개한다.

빛방울의 세계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고집>(1931년).

지난 겨울
까맣게 타들어 간
장판의 검은 운명, 그 운명에
조의를 표하는 듯한

어둠의 침묵 속에서
슬그머니 넣어주는 사식私植처럼
빗줄기가 조용히 소리를 켠다.

불 꺼진 방 안이 조금씩 밝아져 가며
시공時空의 윤곽들이 서서히 녹아 허공에 풀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장판이 검은 눈썹을 왈칵 치뜨며 눈을 반짝였다
책에 갇힌, 자음과 모음을 탈피한 뜻들이 튕기 듯 일어났다
시간이 시계를 박차고 나왔으며
공간은 장소를 툭툭 털어 내고 있었다
라이터 속의 불꽃들이 뜨거운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공중을 둥둥 떠다녔다.

손수건의 잘 마른 햇살이
커피 수증기의 진갈색 슬픔을 따뜻하게 포옹하고 있었으며,
술에 취해 쓰러진 생각의 혀들이, 투명한 시詩들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사람은 사라지고
오직 마음뿐인
마음만 사는 마을에
내리는 빗방울, 빛방울의 세계였다.


_ 지산

이전 08화 에세이와 시8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