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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Jun 16. 2019

에세이와 시10

'신간고서(新刊古書)'로부터 느끼는 소감

은 시대의 산물이다.


'회도동주열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삽화.

바쁜 일정의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어김 없이 찾아오는 공허함. 이 공허함을 달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헌책방으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지난 시대의 의식과 지식, 그리고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서들을 뒤적이다 보면, 어느덧 머릿속의 상념들은 사라지고, 과거로 갔다 왔다는 느낌으로 현재감을 더욱더 느다.

요 며칠 머릿속도 정리할 겸 해서 헌책방을 찾아갔다. 자주 들르는 곳이어서 어느덧 책방 주인인 할아버지와는 친근한 관계다. 주인에 따르면, 헌책들은 책방을 꾸준히 들어왔다 나갔다고 한다. 보통은 헌책방에 들릴 때 30분 남짓 머물지만, 그날은 비가 와서 그런지 분위기상 새로 들어온 고서들을 더 눈여겨보았다. 헌책방 입장에선 새로 들어온 책들이 일종의 '신간고서(新刊古書)'들이다.



'회도동주열국지' 합본 표지.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매우 오래된 듯 표지가 낡았다. 유심히 보니 합본이었다. 합본을 열어 보니 8권의 책들이 보관 상태도 양호하게 묶여 있었다. 낱권들은 실로 제본된 오래된 것으로서 우리나라 책은 아닌 듯하여 물어 보니 중국책이란다.



회도동주열국지 전8권.


도서명은 “회도동주열국지(繪圖東周列國志)”였다. 이거 뭐지, 기존의 내가 알던 ‘열국지(列國志)’ 하고 다른 건가, 생각하면서 호기심이 갔다.



에는 청(淸)나라 선통원년(宣統元年:1909년) 중추절에 상하이의 금장서국에서 석인했다고 적혀 있었다. 선통이 누굴까 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연호였다.



'회도동주열국지'의  전8권 중 제1권.
'회도동주열국지'의  출간년도, 출간기관을 기록한 3페이지. 오늘날 도서로 치자면 일종의 판권 페이지인 셈이다.


푸이라고 하니, 오래전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마지막 황제"가 떠올랐다. 20세기 초 중국 전제 황권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격동기의 모습을 푸이를 주인공으로 스펙타클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자금성을 무대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구시대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개창을 보여준 대작이었다. 특히 어린 푸이가 황제로 등극해 자금성에서 백관들의 알현을 받는 장면은 애처로운 마음과 함께 지금도 압권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장면. 아래는 주인공 푸이 황제.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잠시 스쳐지나고  책방 주인에게 가격을 물어보면서 사겠노라고 했다. 평소 책값을 잘 깎는 줄 잘 아는 책방 주인은 선뜻 말하지 않고, 알아보고 말해 주겠노라고 한다. 이날도 가격 흥정을 통해 합당한 수준으로 구입했다. 그러면서 그 가치성에 대해 긴가민가하여 할아버지께 물었다.

“이 책, 제가 잘 산 거죠?”
“암, 여태껏 살아남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뭐!”
“할아버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책 주인은 책을 가진 사람도, 책을 만드는 사람도 아닌, 책을 읽는 사람이 진짜 책 주인인 것 같아요.”
“그렇지, 책 주인은 책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지.”


 방금 전 책방에서 오래된 LP판을 뒤적이며 구입해 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방금 LP판 구입해 간 사람처럼, 애호가들은 돈을 아끼지 않는 게 특징이지 뭐,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그 물건의 임자야.”


생각해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떤 사람에게는 하잘 것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소중한 물건이 될 수 있는 이치! 마음의 눈으로 봐야 물건에도 애착과 정이 가는 법을 새삼 느껴 본다. 그날은 비도 오고 어눌한 분위기였지만 득템의 기쁨으로 기분을 전환시켰다.


마음은 벌써 한자공부도 하고, 역사도 알고, 힐링의 한 방편을 찾았다는 느낌이다. 힐링을 위해 한자공부를 해야겠다는, 평생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기이한 마음도 가져 봤다.


근데, 한자공부를 위해선 한자 그 자체도 익혀야겠지만, 당연히 문법 같은 것도 있으리라 생각이 들어, 며칠 뒤 아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답변은 국어의 조사와 같은 허사의 용법을 담은 허사대사전이 필요할 거란 귀뜸이었다. 인터넷을 뒤적이다 몇권을 고른 뒤 추천을 받았다.



또 한편으론 청나라 마지막 조 시대에 춘추전국시대의 대혼란기를  담은 '회도동주열국지'가 출간된 이유가 뭘지 생각해 본다. 책은 시대의 산물이다. 책이 출간된 데에는 반드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출간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대혼란기에 현자들의 활약을 명나라 말기의 학자인 풍몽룡(馮夢龍) 기록한 '동주열국지'를 상하이에 소재한 금장서국에서 청나라 말기에 '회도동주열국지'로 재편성해 새로 출간한 배경이 뭘까 생각해 본다.



'회도동주열국지' 2페이지.


풍몽룡은 명나라 말기에  동주열국지를 썼다. 그런데 그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가 자국의 말기에 이 책을 간행한 이유는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는 아마 이 책이 중국의 역사적, 문화적 요체 담고 있는 책으로서 외세에 대항에 중국의 저력을 되찾자는 일종의 정신적 부흥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오는 날 중고서점을 들러 난 '회도동주열국지'를 우연히 얻었다.  시 한편을 소개한다.


도시의 빗방울


정규직이 비를 맞으면 비정규직이라도 되는 것일까

건물에서 나온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비를 피하려 재빠르게 뛰어간다.


비가 오면 세상은 수채화처럼  쉽게 지워졌다

해가 뜬 적이 없으므로 해가 지지 않는 도시는

새벽부터 물방울의 사막이었다, 구름의 하늘이었다

낙타의 혹 같은 우산 아래 깊이 파묻힌 세상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였다.


빨간 발톱을 가진 여자가 검은 지갑을 옆구리에 끼고

 우산을 손에 쥐고 중고서점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창백한 담배 연기는 저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있었다

참 미련스러워 보였다


비오는 날 흐르는 것들은 모두 색깔이었다

스물네 가지 빛깔과 일천사백사십색의 향기가

물방울에 갇힌 듯 보였다.


이층의 중고서점에서  내려다보는  비오는 거리는

점점 지워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처럼  빗방울은 계속 서 있고,

도시는 그렇게 늙어 갔다.


멀리서 보는 도시의 빗방울은 검었다

태양도 넘어가 보지 못한 비의 산이었다.


_ 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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