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헌책방이 해방감을 주는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곳에 가면 헌책이 있고, 주인 할아버지가 있고, 커피를 권하면 마시고, 그러면서 책의 사연과 내용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리차지되어 있다.
새롭게 가격이 매겨진 약 500여 권의 헌책들.
어제는 그동안 노끈에 묶여 잔뜩 들어온 헌책들이 한곁에 놓여 있다. 한 권을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헌책으로서 새로운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책의 권수가 많았던 터라, 설마 하는 생각에 물어 보았다.
"책 가격을 다 매기신 거에요?" "응, 다했지 뭐."
한곳에 25권씩, 20열로 계산해도 500권이 넘었다. 주인할아버지는 눈 때문에 피로함을 빨리 느낀다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던 나로선 놀라웠다.
"헌책의 가치를 어떻게 그토록 빨리 매기세요?" "딱 보면 아는데, 요즘 눈이 침침해. 자식들이 요즘 걱정해.."
성수동 공씨책방의 자상하신 사장님.
그러면서 6권 시리즈로 노끈에 묶인 오래된 무협지를 꺼내 보여 주신다. 1974년도 초판의 "천하제일고수"였다. 자기는 몰랐지만 이게 100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시는 것이었다. 살펴보니 어릴적 본 "대야망"과 비슷한 제본의 책들이었다. 놀라웠지만 수긍이 갔다. 국내 1세대 무협작가의 초판시리즈 완본이었다. 귀하다고 볼 수밖에 없을 듯했다.
순간 나의 몸엔 전율이 일었다. 나이 먹은 책이 희귀하여 값이 높아지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 가격 차가 컸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가. "남한산성"의 김훈 작가가 최근 경북 안동에 내려가 신문지상에서 요즘 세태를 질타한 말이 생각났다.
"악다구니 문화, 욕지거리 문화, 노인 경시 문화..."
사람도 책처럼 지내 온 가치에 따라 더 높은 가치가 매겨지는 문화가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음은 하는데, 아니 있었지만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은 그 전통을 서애 류성룡의 안동에서 역설적으로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실태다.
책은 헌책이든, 새 책이든 인쇄된 내용은 동일하다. 그런데 왜 새 책보다 물가상승분 이상으로 가격이 매겨질까? 수집가의 호사스러운 사치인가, 그 내용의 가치가 상승한 것인가, 책의 존재 자체가 희소성을 띤 탓일까? 헌책 시장의 경제학은 지금도 낯설지만, 내용의 가치가 상승했다고 난 본다. 그분도 외형의 낡음에 가치를 매긴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평소 그 책의 이력을 소개하며 값을 매기는 그분의 습관으로 미루어 볼 때,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헌책의 가치 상승은 다음의 순서로 매겨지는 듯하다.
1. 콘텐츠의 인본성과 영속성 2. 책의 상태 3. 희소성에 따른 수집성
제일의 근본이 1의 상태부터 파악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책의 상태, 수집성 순서로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라 개인적인 주관으로 판단되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서울미래유산 공씨책방. 오래된 LP판들도 상당수로 보관돼 있다.
죄우로 늘어선 고서들과 오래된 LP판들.
수도권과 지방에서 눈에 띌 때마다 헌책방을 들러봤지만 주인할아버지처럼 말로 주장하지 않으면서 내심으로 주장하고,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어필하고, 자상하면서도 강단 있는 분은 처음으로 느껴 봐, 이런 성품이 세월의 품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이 시대는 어른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도 그렇지만, 김훈 작가의 성토처럼 악다구니의 시대에는 지혜롭고 현명한 자는 더더욱 숨는다. 그들의 공통점은 시대가 시끄러울수록 조용한 삶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난 경험상 알고 있기 떄문이다.
이곳의 책들도 마찬가지다. 한때 최고의 베스트셀러 도서로 언론광고를 탓던 쟁쟁한 책들이지만, 지금은 세간의 기억에 잊혀진 채 이곳에 조용히 누워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심지어 100년 이상이나 된 책들도 많다.
항룡유회(亢龍有悔).즉 최고의 전성기에 오르면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는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처럼 조용하게 살아가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항룡유회. 주역의 한 글귀로서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다는 뜻이다.
꼬꼬지 옛날
옛날 옛날 꼬꼬지 옛날 다솜이와 살님네가 굿것 하나 뵈지 않는 점잖은 밤을 해쓱 세우며 혼맹이가 빠지도록 서로가 서로를 웅숭깊게 생각하였던 옛날 옛날 꼬꼬지 옛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