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의문으로 삶의 이유에 대해 반문하다, 가버나움(Capernaum)
처음 영화를 탐닉하게 된 초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되어, 이제는 나름 영화 좀 본다고 자부심을 뽐내며 영화광인 척하고 싶었다. 그 끝은 고전 영화 감상으로 재개봉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는 것이었다. 나름 자신감 뿜으며 착석한 영화관에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숙면을 취하고 엔딩크래딧을 보았다. 이후로 날뛰던 자만을 가라앉히는 나름의 핑계로 현실에 치어 영화를 볼 시간이 없다 되뇌이던 내가 다시금 용기내어 영화관을 발걸음하게 된 이유는 초록창 검색에서 보게된 이 영화 리뷰들 때문이었다. 매일 한 편씩 새로이 쓰여지는 리뷰들을 볼 때마다 이 영화만은 절대 놓쳐서 안 되겠다는 느낌을 받아, 날이 궂어 어두웠던 설 연휴의 어느 날, 압구정에 위치한 나의 영화관에서 관람한 레바논 영화인 가버나움이다.
영화는 작은 남자 아이가 속옷만 입은 체, 신체검사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검시관의 입에서 나오는 믿을 수 없는 말들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검사를 받는 아이 이름은 자인,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정확한 나이는 모르고 12살로 추정될 뿐이다. 신체 검사를 마치고 수갑을 찬 작은 남자 아이는 커다란 어른들이 이끄는대로 카메라 프래쉬가 펑펑 터지는 법정에 들어간다. 그 곳에는 아이의 부모로 추정되는 이들이 아이의 반대편 자리에 앉아있으며, 서로가 진술을 하면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베이루트 빈민가에 사는 자인은 학교가 너무 가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집주인 식료품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아이이다. 껑충한 키의 고운 아이 사하르를 많이 아끼는 오빠이며, 엄마를 도와 약국을 순회하며 마약을 만들 약을 수집하고, 어린 사하르에게 장가들기 위해 환심 사기용으로 사탕을 주는 식료품점 아저씨의 흑심을 눈치채는 영리함을 갖추기도 했다.
초경을 시작한 사하르가 어린 나이에 팔려가듯 원치 않은 결혼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이를 눈치챈 부모의 매질에 분노하고 집을 뛰쳐나간다. 정처없이 버스에 앉아 옆자리 할아버지를 따라 내린 놀이공원에서 춥고 굶주린 자인에게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준 라힐과 그녀가 사랑한 남자와의 결실인 아기 요나스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바간에서 일출이나 일몰로 유명한 파고다에 갔을 때, 몇몇의 아이들이 상주해있었다. 물건을 늘어놓고 팔기도 하고 파고다를 올라가는 좁은 길에 양초로 불을 밝혀놓기도 했으며 '도네이션'이라 말하며 구걸을 하였다. 한국이라면 당연히 학교를 가야 할 아이들이 하루 종일 관광지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몇몇 영어 단어로 구걸을 하는 모습은 매우 씁쓸했다.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얼굴에 바른 타나카가 아름다워서 동의를 얻고 사진을 찍자 '머니'라는 단어를 뱉은 친구의 딸과 나이가 비슷한 어린 여자 아이를 마주할 때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삶이 어찌 이럴 수 있나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
영화를 보다 그 이유를 엿본 거 같았다. 요나스를 태운 간이수레를 끌고 가는 자인의 뒷모습은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발버둥쳤지만, 어린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현실의 무게에서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갔다. 알베르 까뮈는 태양이 너무나 눈이 부셔서 사람을 죽였다고 썼지만, 자인에게는 눈부신 햇살조차 절망이었다. 삶에서 이토록 철저한 절망을 경험해 본 적이 있나? 삶이 이리 무가치하게 느껴본 적이 있었나? 삶의 무료함을 버티기 귀찮아 죽어버릴까 생각했던 고등학생의 나는 얼마나 호화로웠나.
그럼에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니까 픽션이겠지'라는 알량한 믿음 때문이었다. 아무리 레바논 거리에서 캐스팅한 사람들이어도 그들의 실제 얘기가 아니겠지라는 외면은 한국 관객들을 위한 자막에 무너져 버렸다. '자인'은 이 영화에 출연한 덕분에 노르웨이에서 난민 지위가 인정되어 14살의 나이에 처음 학교에 가게 되었고, '요나스'는 친부모와 함께 케냐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사하르'와 '메이소운'도 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알려주는 순간, 나는 이 영화가 실제이며 사실임을 마주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고 외치는 자인의 부모에게 쉬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합법적인 일자리가 없는 사회는 이렇게 철저하게 삶을 유린당하는 개인의 삶을 만들어낸다. 비록 자인 부모의 잘못이 없어지지는 않지만, 왜 이들이 이러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수 밖에 없는가 생각하며 참혹한 현실에 터지는 눈물을 멈추기 힘들었던 영화, 가버나움이었다.
※ 이 리뷰를 쓰는 도중, 3월 1일 한국에서의 성원에 특별히 감독님과의 영상 GV가 열렸었다. 너무 늦게 알아 갈 수 없어 참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