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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양 Dec 02. 2020

저녁이 있는 삶은 가능할까

국세청 본청 라이프를 해부하다

2014년 9월, 본청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6시 출근, 11시 퇴근'...어느 7급 공무원의 하루라는 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경기도 구리시에 사는 국세청 본청 7급 조사관 L씨는 5시반에 일어나 8시 전까지 서울 수송동 국세청에 도착해 일을 시작하고 밤 11시까지 일하다 퇴근해서 새벽 1시에 잠드는 일상을 기사로 다뤘다.(국세청 본청은 2014년 12월에 세종시로 이전했다.)


나 역시도 그 시절에 본청에서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서 '맞아맞아'하며 물개박수를 쳤다. 땡출땡퇴하는 공무원인줄 알았는데 정말 그렇게 사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6시 출근, 11시 퇴근'...어느 7급 공무원의 하루 기사 보기


2018년 7월 1일, 노동시간을 주 최대 68시간에서 주52시간으로 단축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공무원은 근로자로 안쳐주니 주52시간이 적용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본청에 있는 동기에게 물어봤다.

"주52시간이 시행됐는데 야근은 좀 줄어들었니?"
"그럴리가 있겠어? 똑같지 뭐. 아침 8시까지 출근하고 밤 10시 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지."


그러면 그렇지... 그래도 혹시나 했던 내가 바보구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청에서 근무하려고 하는 이유는 뭘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본청 라이프


국가공무원법 제9조(근무시간 등)

① 공무원의 1주간 근무시간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으로 하며, 토요일은 휴무(休務)함을 원칙으로 한다.
② 공무원의 1일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하며,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로 한다. (이하 생략)


법에서 정한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그러나 본청에서는 많은 분들이 8시 이전에 출근하고, 서무 업무를 담당하는 분들은 그보다 일찍 출근한다. 지방청과 세무서는 그보다는 느슨해서 8시반~9시 사이에 도착하는 편이다.


퇴근시간은 대중이 없는데 보통 10시를 정시퇴근으로 여겼다. 저녁약속이 있으면 눈치보다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다고 관리자에게 말씀드리고 먼저 나가는데,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썰양씨 요새 일이 없나봐'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10시까지 매일매일 빡세게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기 또한 업무의 일부라고 했다. 국정감사 시즌이나 국회 예결산 시즌에는 자정이 넘도록 사무실을 지켜야 한다. 다른 부처는 필수 인력만 대기를 하는데 국세청은 유독 예외가 없다. 수석팀은 사무실에서 밤을 새고, 그 외 팀은 자정 넘어 적당한 시간에 퇴근했다가 새벽같이 출근을 했다.


요즘같은 시절에 왠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얘기냐고 하겠지만 국세청이라는 조직의 분위기가 그러하다.


그나마 금요일은 서울에 가족을 둔 직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날이라서 6시 정시퇴근을 한다. 그래도 국회업무 등 시급한 일이 있으면 금요일도 어쩔 수 없이 야근이다.


일요일도 오후에 출근한다. 2017년에 본청에 있을 땐 아예 공식적으로 일요일 출근을 지시했다. 휴직 중일 때 일요일 밤에 환하게 불을 밝힌 국세청 건물을 보면 가슴이 답답했다. 본부에 가면 다시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좋은지 늘 의문이었다.


2017년 12월 25일 저녁 8시 국세청. 크리스마스임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본청의 매력


본청 근무의 가장 큰 장점은 세무서에 비해 승진이 빠르다는 것이다. 굳이 승진에 목매달지 않아도 정년까지 쭉 근무할 수 있는 것이 공무원의 장점이겠지만, 동기들은 다 승진하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으면 자괴감을 느끼게 되어 남들이 승진 레이스를 뛸 때 덩달아 뛰게 된다.

그놈의 승진이 뭐길래


7급에서 6급 승진의 경우 본청에 전입하면 빠르면 3-4년만에 승진할 수 있다. 세무서에서만 근무할 경우 7급에서 6급으로 승진하는데 10년 이상 걸리는데 비해, 7급 3년차에 본청에 전입해서 3년만에 승진하면 6년만에 6급이 될 수 있다.


드센 민원인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물론 근무하는 부서에 따라 민원 전화를 많이 받을 수도 있고, 세무서에서 해결되지 않는 민원을 본청에 질의하다보니 난이도는 더 높을 수도 있다. 그래도 민원인이 끊임없이 찾아오거나 전화를 하는 건 아니라서 사람을 상대하는 스트레스는 세무서보다 덜한 편이다.


무엇보다도 본청의 매력은 특정 분야에서 국세청을 대표해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아닐까 싶다. 국제조세관리관실에 근무하는 7급 직원도 국세청 대표, 즉 대한민국 대표로 OECD 회의에 참석해서 발언을 한다. 법인세과에 근무하는 6급 직원이 기획점검 업무를 기획해서 보고서를 쓰고 결재를 받아 지방청에 뿌리면 전국 110여개 세무서에서 일사분란하게 업무를 처리한다. 결과를 보고하면 취합해서 윗분들께 보고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뿌리기도 하고 국회에 보고하기도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특정 분야만큼은 전국적인 시각을 갖고 고민하게 되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벤치마킹도 하니 시야가 넓어질 수 밖에 없다.

저도 OECD 회의에 국세청 대표로 가봤습니다


본청에는 어떻게 들어갈까?


6급이하 직원에 대한 승진발표가 11월 중순에 나면 본청에서는 그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내년에 전입할 직원을 물색한다. 본청 직원을 선발할 때는 직급별, 성별, 지역별로 퍼센트가 할당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여직원 비율이 늘었고, 서울청을 제외한 지방 출신 비율도 늘었다.


본청은 주로 6, 7급 직원이 들어가고 8급 직원이 국마다 1-2명 있다. 8급은 TO가 작아서 경쟁이 치열하나 일단 전입하기만 하면 2-3년만에 7급을 달 수 있다. 7급 공채로 입사해서 세무서에 초임발령 받아 2-3년 지난 새내기가 본청 7급으로 전입하기가 좋다. 나이가 많지 않고, 특히 처자식이 없으며, 승진에 뜻을 둔 7급 공채 후배라면 본청 전입을 추천하고 싶다. 한참 일을 배울 4년차에 본청에서 열심히 일하고 빨리 승진하면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본청 전입희망직원을 모집하는 공지가 12월 경에 뜨는데, 그때 묻지마 지원을 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보면 된다. 본청에 전입할 뜻이 있다면 본청에 인맥이 닿는 사람을 미리 물색해두는 것이 좋다. 자기기술서도 미리 작성해놓으면 허둥대지 않고 보낼 수 있어서 좋다. 인맥이 없다 싶으면 본인의 직상급자와 상의해서 직상급자의 인맥을 활용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는 평소에 일을 성실하게 잘 해내서 이 친구를 추천해도 욕은 안먹겠다 싶을 정도의 믿음을 심어주어야 가능할 것이다. 국세청 뿐만 아니라 다른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판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본청에서의 5년은 행복했는지?


강동세무서에 발령받은지 2년 10개월 만에 본청 세정홍보과에 전입해서 4년 9개월만에 승진하고 5년만에 세무서로 탈출했다. 빛나는 30대의 절반을 본청에서 불태웠고, 하얗게 재가 되어 세무서로 나왔다.


본청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내 스케쥴을 내맘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눈치껏 저녁 약속도 잡고, 나름대로 취미생활도 즐기면서 워라밸을 추구했으나, 갑자기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하고 일을 한다든지, 쉬는 날 국장님이 출근하시니 다들 나오라고 연락을 받아서 새벽에 강원도에서 광화문으로 내달리던 때도 있었다. 나의 개인 사정을 봐주는 곳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어도 여기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했다. 거대한 기계 속에 오도가도 못하게 물려있는 톱니바퀴가 된 느낌이었다. 얼마든지 언제든지 교체가능한 부품 중 하나였다.


내 커리어를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도 나를 힘들게 했다. 법인세과나 조사과처럼 세무 본연의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면 5년이라는 세월이 오롯이 경력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정홍보과 5년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커리어였다. 승진에 눈이 멀어 탈출 기회를 포기하고 눌러앉았는데 그게 5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세정홍보과에서의 5년이 아무 의미없는 허송세월이었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본청인지라 이래저래 기획 업무를 하고 보고서를 쓰면서 글쓰는 실력이 늘었다. 다른 과에서 하는 업무를 소개하는 일이 많아서 국세청이 돌아가는 사정을 얕고 넓게 알게된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 하겠다. 비록 홍보과지만 본청 생활을 5년이나 해냈다는 점을 관리자분들이 높게 쳐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결론은?


본청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하지 않다. 나를 포기하고 톱니바퀴처럼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는 것이 분명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한번이라도 근무해보았으면 한다. 워라밸도 분명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3년에서 5년을 꼬박 투자하면 성큼 성장해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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