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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금나비 Aug 24. 2024

가벼운 가방

아들이 아침 7시 반쯤에 왔다.

오늘은 학원 쉬는 날이라 어제 모처럼 아는 형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었다. 더 놀다가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다. 아는 형은 학원에서 알게 됐는데, 대학을 다니다 군대 제대하고 연기가 하고 싶어 재수를 선택한 형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와서 자취를 하며 생활하는 것 같았다.

아들은 아침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로 수다삼매경에 빠져있다.

나는 거실 바닥에 놓여있는 가방을 아들 방 옆에 놓으려고 했다.

‘무겁겠지?’

나는 한 손으로 잡고 가방을 올려봤다. 너무 가벼웠다. 들어 올리는 가벼움보다 마음의 가벼움이 느껴졌다.

짐같이 삶을 누르던 가방 안에는 학교 수업 교재, 학원 문제집, 필통, 연습장, 체육복에 학업 스트레스와 교우관계 속에서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들어가 돌덩이 같이 무거웠을 것이다. 중학생인 여동생의 책가방도 언니, 오빠의 짐을 물려받아 무겁다.

 

아들은 고2 겨울방학 때부터 책가방이 가벼워졌다. 진로를 바꿨기 때문인데 그걸 자주 깜박하는 나는 계속 무거운 가방만 상상했나 보다. 큰딸 입시를 치를 때 딸만큼 힘들었는데, 그 마음의 연속이라서 아들이 예전보다 가볍게 생각하는 가방의 무게와 삶에 내가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별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아들과 나의 괴리감을 좁혀야겠다.


"엄마, 연기 학원에 다닐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남편과 갈등도 있었지만 설득 끝에 진로를 변경한 아들, 여느 친구들과는 다른 생활 속에서 밝은 표정과 때론 자신감의 빛깔을 찾은 것 같아서 나도 그런 아들의 마음을 읽을 때면 걱정보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가끔 화장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할 때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모른 척하면 견딜만하다. 귀가 싫어하는 거지 마음은 좋아하는 소리니까.

가끔 소리에 예민한 큰딸은 화장실에서 노래 부르는 남동생에게 "너 시끄럽게 하면 아래층에서 올라온다!"라고 말리기는 한다.      




유치원 때부터 선글라스를 쓰고 ‘비’에 ‘Rainism’을 부르며 부끄럼 없이 춤을 뽐내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제는 아들이 선글라스에 몸빼바지를 입고 내 밀짚모자를 쓴 채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나가려는 아들을 붙잡으니 씩 웃었다.


"웬 몸빼바지?"

"오늘 수업에 농촌에 가서 농땡이 치는 학생 씬이 있어서요!"

아들이 꽃무늬 몸빼바지를 그제 하나 샀나 보다.

"너, 너 그렇게 나갈 거야?"

"네, 멋지잖아요!"

"너, 바지 거꾸로 입은 건 알지?"

바지 주머니가 애매하게 붙어 있어 아들이 속을만했다. 아들은 바지를 내 앞에서 훌러덩 벗더니 바로 입었다.

나는 이마를 '탁' 하고 짚고 싶었다. 아들은 연기가 재밌나 보다. 몸빼바지를 입고 부끄럽지 않게 나가는 아들의 발걸음이 팔랑팔랑 가벼웠다.


지금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아들의 열린 가방 안에는 필통과 <시라노>라는 희곡책과 아이스크림 몰드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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