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멕시코에서 살고 있는 동생네가 딸 방학과 아가씨 결혼을 맞아 한국에 오게 되었다. 시댁은 멀어서 친정에서 한 달간 묵게 되었고 어머니가 재작년에 돌아가셔서 친정에는 아버지 홀로 계셨다. 나는 조카에게 줄 옷과 음식을 택배로 보내주었는데, 텃밭에서 기르고 있는 고구마 줄기도 함께 넣어 보냈다. 동생이 요리해서 아버지와 함께먹으라고 보내준 것이었다.
동생이 한국에 와서 일정이 생각보다 빡빡한지 친구들 만나고 조카와 즐겁게 지내느라 친정에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동생이 세 자매 카톡방에 고구마 줄기를 볶음 해서 잘 먹었다며 사진을 보내줬다. 그런데 고구마 줄기 멸치볶음이었다. 동생은 바빠서 요리를 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대신 요리했는데 너무 맛있었다며 올린 사진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물리게 먹었던 멸치볶음이 생각났다. 어떻게 보면 슬픈 기억이다. 친정어머니가 30대 후반부터 아프셔서 아버지가 직장도 다니시며 세 자녀의 도시락 반찬을 싸주셨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싸 주셨다는 것도 모른 체 불평불만 하며 학교에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김치에 멸치가 섞인 반찬을 들고 다니는 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왜 맨날 신김치에 멸치야!’
어떤 친구는 오징어채 볶음 반찬을 매일 가져오다시피 했는데, 친구들이 달려들어 먹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나는 눈알과 똥이 보이는 시커먼 멸치볶음을 팔로 감추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멸치볶음이 아버지가 해준 반찬이라니!
동생이 보내준 고구마 줄기가 섞인 멸치볶음 사진이 아니었다면 모를 일이었다. 나는 확인차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볶음을 싸 주셨어요?”
“그래, 내가 싸주었지.”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세 자매의 도시락 반찬을 싸주셨는데 힘드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멸치볶음이라도 싸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학교에서 식사를 걸렀을 것이다.
“반찬을 할 줄 아는 게 뭐 있냐? 맨날 멸치볶음이지.”
“아빠 그때는 몰랐는데, 정말 고마웠어요. 아빠가 그 반찬을 싸주지 않으셨으면 제가 어떻게 학교에 다녔겠어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 생각도 났다. 아픈 어머니도 약을 드시고 좀 괜찮으실 땐 늘 자녀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주려고 애쓰셨던 것 같다. 놔두시라고 해도 꿈적거리고 해 주시는 마음이 사랑이었다.
“아빠, 고구마 줄기에 간장만 넣고 볶아도 되는데, 멸치는 왜 넣으셨어요?”
“멸치를 넣어서 볶아야 맛있잖아!”
나는 멸치 들어간 반찬이 물리도록 싫었는데, 아버지는 멸치가 들어간 반찬이 맛있는 거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니 딸들도 좋아할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없는 형편이었지만 멸치 반찬을 꼭 싸주셨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40년 가까이 흐른 후에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를 돌봐주는 아빠로 감사했는데, 커가면서 아버지를 미워한 적도 있었다.
티브이에서 연예인들 가족사를 보며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서 집안의 어려움을 겪는 일을 봐왔는데,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는 왜 집안이 힘들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이 추억보다는 몇 장 안 되는 사진같이 딱딱하게 남아있다. 그 속에 소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나 자녀들이나 각자 힘들었기에 서로를 돌볼 틈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때는 부모님의 힘들었던 삶을 자녀들은 고스란히 아이의 감정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이 퇴색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인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아버지도 어떻게 사는 삶이 스스로 행복한 건지 모르고 산 세월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게 감사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살가운 딸이 못돼서 아버지께 늘 죄송한 마음도 있다.
오늘도 동생이 맛있다며 올린 고구마 멸치볶음을 생각하면서, 가려진 아버지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앞으로도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해서 아버지께 감사와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