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홀로 계신 친정아버지 집에 들렀다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냉동실에서 언 홍시를 꺼내며 가져가라고 하셨다.
“가져가면 저만 먹어요!”
나는 아버지를 만류하며 말했다.
“그래도 가져가라.”
아버지의 말에 도로 냉동실에 넣으려다가 꼭 가져가라고 하신 말씀에 도로 배낭에 넣었다.
“아빠, 빈손으로 가려고 했는데 가방이 가득 찼어요. 잘 먹을게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제 작년에 돌아가시고 혼자되셨다. 어머니가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계셨다면 이렇게 자식들이 찾아올 때 음식도 푸짐하게 만들어 놓고 돌아갈 때는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주셨을 것 같다.
아버지가 뭐라도 싸줄 게 없는지 살피시다가 냉동실에서 꺼내주신 여덟 개의 홍시. 나는 집에 꽉 찬 냉동실과 집으로 갈 때 버스와 전철을 몇 번씩 갈아타며 2시간 반 동안 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아버지가 주신 언 홍시와 고구마를 어깨에 메고 가야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집에 올 때도 명절 음식과 선물을 가져오느라 어깨가 무겁고 팔이 시큰했다. 언 홍시는 놓고 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 개씩 꺼내서 녹으면 먹어. 냉동실에 꼭 넣어두고.”
홍시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가을만 되면 지인을 통해서 감을 세 박스나 사신다. 한 박스는 집에 두고 두 박스는 딸네 집에 택배로 부치기 위해서다. 익으면 하나씩 드시다 냉동실로 들어가는 홍시.
나는 집안일을 하다 단 게 당겨서 냉장고를 뒤졌다. 냉장실에는 마땅한 게 없어서 냉동실을 보는데 마침 언 홍시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 집에서 가져온 지 2주쯤 지난 것이었다. 나는 그 딱딱한 것을 꺼내서 녹기를 기다렸다. 덜 녹은 홍시를 쇠숟가락으로 퍼먹는데, 껍질이 같이 씹혔다. 늘 이렇게 먹는 게 지겹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를 찾고 싶은 것처럼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냉동실에서 홍시를 한 개 더 꺼내 칼로 돌려가며 껍질을 깎았다. 껍질은 톱밥처럼 단단하다가 이내 시들어져 죽처럼 변했다. 다 깎은 것을 몇 개로 토막 내서 믹서에 우유를 넣고 꿀과 요플레를 넣어 갈았더니 홍시 라테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만드는 내 모습을 되짚어 생각하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이들한테 뭔가를 만들어 주거나 집안일을 할 때도 얼마나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쁘게 했나? 요즘 부쩍 사춘기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면서 몸 마음이 지쳐있어 정성보다는 의무감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거운 마음이 나를 꽉 붙들고 감추고 있는 문으로 홍수처럼 떠밀려 왔다. 그래서 이렇게 의욕 넘치게 내 입에 들어갈 거라고 라테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지, 나보다 자식 입에 들어갈 때가 더 기쁜 건데…….’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은 아이들 먼저 챙기고 남긴 음식은 아까워 처리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늘 그래야 하는 일상에 대한 회의가 불쑥 나온 것 같다.
아이들은 왜 엄마 마음을 몰라줄까? “엄마, 먼저 먹어 봐!” 라던가. 나도 늦게 해주고 싶은 게 있어 자식들에게 거절하면 “이따가 해주세요. 지금은 좀 쉬세요.”라는 위로의 말을 해줄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질풍노도의 사춘기인 큰딸과 아들을 봐왔기 때문에 그 뒤로 막내도 그럴 것이라 느끼는 나에게 기대는 기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내려놓는 마음이 되었다.
‘바라지 말고 해줘야지!’
바라는 마음이 커질수록 내 시선으로만 아이들을 보게 된다.
“다 먹었으면 얼른 치워야지!”, “양말은 왜 맨날 뒤집어 놓니!”,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난다고 했지!”
아이들한테는 잔소리일 때가 많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그걸 알면서도 나는 반복되는 말을 해왔던 게 아닌가?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큰딸이 정시 원서를 내고 보름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아이들과 지내며 그동안의 생활 속에 달라진 점들이 생각났다.
고3 때까지는 집안일을 되도록 안 시킬 생각이었는데, 막내가 설거지를 해보고 싶어 해서 큰딸과 막내에게 ‘가위바위보’로 정해 저녁 설거지를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아이들이 더 집안일을 돕게 되었다. 분리수거도 얘기하면 처음에는 엄마 일인데 시킨다고 투덜대다가 나와 같이 가서 하는 일이니 곧잘 적응했다.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 젓가락은 식탁에 놓아주라고 하고 월남쌈을 만들 때는 재료는 다 만들어 놓고 싸서 먹어 보라고 했다. 큰딸도 막내도 물 무친 라이스페이퍼에 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고 돌돌 말아 쌈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터지기도 해서 울상이었다가 터진 쌈을 꼭 쥐고 입 안에 넣고는 맛있다고 미소를 짓는 모습이 예쁘게 보였다. 두 개, 세 개 만들면서 아이들도 제법 예쁜 쌈을 만들어 먹었다. 그동안 아이들한테 같이 하자고 말 못 하고 가슴앓이했던 시간이 후회도 됐지만 이런 행복한 시간을 맞기 위해 필요했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 물론 내가 준비해 주는 과정은 길지만 마지막에 아이들과 함께 치우고 만드는 과정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일이 가볍게 느껴지고 보상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다가도 다시 지칠 때가 있을 거다. 그럴 때면 어떻게 할까? 나만의 취미생활을 해본다든지, 음악을 틀어놓고 노래 부르며 집안일을 한다든지 방법을 찾을 거다.
힘든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게 설거지하면서 ‘쓱’ 씻어내고 빨래하면서 ‘빡빡’ 빨아내고 밥을 지으며 김으로 뽑아내고 청소하면서 ‘싹’ 빨아들여 본다. 늘 해야 할 일상의 일과를 고된 일로, 짐으로 여기지 않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엄마는 가정의 안주인이란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해줘야 할 선물이 많은 거라고.
홍시 라테를 만들 때처럼 아니 그 이상 아이들 음식을 신이 나서 만들어 주고, 아이들의 뒤집힌 양말을 핀잔하지 않고 가볍게 빨아주고, 먹은 그릇도 말없이 치워 주고…….
어미 새가 혼자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먹이를 계속 새끼에게 물어다 주는 것처럼, 아이들이 깨달아서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도 바라지 않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단계마다 필요한 도움과 사랑을 변함없이 부어주는 것, 그게 부모의 마음인 것 같다.
나는 아들과 나누어 먹었던 홍시 라테의 추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에게 라테를 그릇에 담아서 먼저 주고 나는 남은 것을 먹었지.
“이게 무슨 스무디야?”
“홍시 라테야.” “엄마가 처음 해준 건데도 맛있네!”
“그렇지!”
새로운 음식을 해주면 아들은 맛없다고 하기 일쑤였는데, 홍시 라테는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는 단맛이지만 나는 첫 번에 성공이라고 말해주는 아들의 칭찬이 고마웠다. 아들과 나는 서로 홍시 라테를 숟가락으로 연신 퍼서 입 안에 가득 넣었다. 만들 때의 기쁨과 조미료 같은 사랑의 맛이 더해져서.
나는 맛있게 라테를 먹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손자한테도 전해진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주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로 와서 아들에게 더 주고 싶은 사랑으로 전해졌으니 말이다.
냉동 홍시가 홍시 라테로 변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던 짐이 가족의 늘 반복되고 더해지는 사랑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