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5) - 김기태

맺으며 - 평범함이라는 형벌을 넘어, 우리만의 인터내셔널로

by 세잇

심판대 위에 세워진 평범함

우리는 언제부터 자신의 삶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검열을 통과해야 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을까. 조맹희가 마주한 인터넷의 조롱, 진주와 니콜라이에게 낙인처럼 찍힌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는 명명, 그리고 잠든 학생들의 정수리를 보며 그들의 주체성을 의심해야 하는 교사 곽의 고뇌는 모두 하나의 지점을 가리킨다. 우리 시대의 ‘평범함’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값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과 성취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비싼 입장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라는 절규

소설 속 인물들은 성실하다. 결석하지 않았고, 법을 어기지 않았으며, 노동의 가치를 믿으며 하루 이만 보를 걷거나 거름을 퍼 담는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격'을 묻는다. 더 노력했어야 한다고, 더 영악했어야 한다고 훈수 두는 세상 앞에서 그들은 묻는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고. 이 질문은 개인의 무능에 대한 자책이 아니라, 정직하게 살아도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향한 날카로운 화살이다. 송희가 100kg이라는 숫자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94kg만큼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결과 중심의 세상이 정한 산술법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의 산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항의 새로운 언어

작가는 이 부조리한 시스템에 맞서는 독특한 저항법들을 제시한다. 교실에서 깊은 잠에 빠진 학생들은 나태함이 아니라, 삶의 맥락을 삭제당한 제도 교육을 향해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바틀비들이다. 송희가 역도를 통해 배우고자 한 것이 바벨을 들어 올리는 영광이 아니라 내 힘으로 '버리는' 감각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내 어깨에 놓인 삶의 비구성을 기어이 들어 올려 본 사람만이, 그것을 예속이 아닌 주체적인 의지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폐허 위에 세운 가장 작고 위대한 공화국

결국 이 소설들이 도달하는 구원은 거창한 혁명이나 신분 상승이 아니다. 그것은 '피자나라 치킨공주'를 기다리며 시시한 농담을 나누는 거실, 서로의 등을 보며 설거지를 하는 구체적인 일상 속에 있다. 국가와 시대라는 거대 서사가 지워버린 이름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곁을 내어줄 때, 그 좁은 완충지대는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공화국, 즉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된다. 사랑은 누군가를 치유하는 마법이 아니라, 내가 파괴될 각오를 하고 상대의 곁을 지키는 '상호확증파괴'적 연대이며, 이 지독한 긍정만이 우리를 삶이라는 진창에서 건져 올린다.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각자의 속도로

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닿게 된다. 평범함이란 타인의 승인을 기다리는 상태가 아니라, 모순적인 기억들을 뭉쳐 눈밭에 굴리며 묵묵히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을. 록이 죽었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여전히 록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맹희처럼, 94kg의 무게를 견디고 단정한 마음으로 목도리를 여미는 송희처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속도로 흐르고 있다.


김기태 작가가 발명한 '응원의 태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의 삶이 비록 중심부가 아닌 프레임의 양 끝단에 걸쳐 있을지라도, 그 성실한 생존 자체가 이미 하나의 위대한 서사라고 말해주는 것. 이름 없는 우리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때, 세상이 정해놓은 비관적인 예언은 반드시 빗나갈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도 무례하게 다정해진 마음으로, 각자의 인터내셔널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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