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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단어를 들여다보는 일은

by 세잇

대화, 이메일, 회의, 메시지, 통화 등을 통해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그 말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표정을 지녔는지, 누구의 시간과 어떤 마음이 담겼는지를 생각해 본 적은? 잘 모르겠다. 의미를 알고 쓰고 있다 생각했으나 실은 ‘그냥 그렇게’ 받아들인 채 살아가는 건 아닐는지. 황선엽 작가의 『단어가 품은 세계』와 이진민 작가의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낸 단어들을 되짚으며 그 안에 담긴 사람과 삶의 조각들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데, 두 권 모두 읽는 내내 밑줄 긋느라 자주 멈춰 선건 안 비밀 :) 문장의 결을 더듬듯 읽다 보니 단어 하나하나가 작은 창이 되어, 그 뒤편에 있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마법 같은 순간을 가진 두 책.


황선엽 작가는 작은 궁금증 하나가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얼룩백이 소나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의 동백꽃 같은 단어들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익숙하다고 여겼던 세계가 낯설어진다. '개발새발'이 틀린 표현이고 올바른 말은 '개발괴발'이라는 사실처럼, 우린 말의 정확한 모양도 그 안에 든 결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그저 흉내만 내고 살아온 건 아닐까 싶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얼룩백이 소(칡소)나 검은 소와 흰 소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 생각하는 것 가운데 습관적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조금만 의문을 품고 생각해 보아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작은 궁금증 하나가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작은 궁금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소하다 여겨지는 것들에 궁금증을 품을 줄 알면 더 많은 것들이 궁금해지고 더 알고 싶어 집니다. 흔히 듣고 보던 말과 물건을 달리 생각해 보고, 습관처럼 하던 행동에 의문을 품어보고 질문해 보는 것에서 남다름은 탄생하는 것일 테지요.


동백은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가에 많이 자라며 강원도 내륙에서는 전혀 볼 수가 없는 꽃인데요. 강원도가 고향인 김유정이 말하는 동백꽃은 무엇일까요? 강원도 방언으로 동백은 생강나무를 말합니다. 따라서 김유정이 말한 동백꽃은 생강나무꽃인 것이지요.


이진민 작가는 단어를 알아가는 과정은 사람들의 삶을 아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독일에서의 생활을 배경으로 다양한 언어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여러 인상 깊은 대목 중 하나는 독일어 ‘gefallen(게팔렌)’과 ‘lieben(리벤)’인데 직역하자면 gefallen은 '누구의 마음에 들다' 정도이고 lieben은 '사랑' 이겠으나, 사랑조차도 독일사람들은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꺾여서 당신에게 도달하고, 당신 역시 꺾여서 나에게 도달하는 것' 이란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섬세한 언어의 굴절인지.


gefallen이 사람에 쓰일 때는 ‘나는 저 사람이 좋아’보다는 ‘나 저 사람이 마음에 들어, 저 사람 괜찮은 것 같아’ 정도의 느낌이다. 눈이나 귀로 감각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상태. 그러고 나서 좀 더 알게 되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비로소 mögen(뫼겐: 좋아하다)이라는 동사를 쓰면서 그 감정을 느끼는 주체를, 즉 나를 주어로 세운다. 그리고 마음이 더 깊어진다면 결국 알쏭달쏭한 그 단어, lieben(리벤: 사랑하다)을 꺼내게 되겠지. 이 단어를 꺼내도 되는지, 내가 주어이고 그대가 목적어인 것이 맞는지 계속 고민하면서. 누군가가 내 마음에서 무수한 반사와 굴절을 거쳐 자리 잡는 모양새란 그런 것이다. 사랑이란 원래 ‘내가’로 단단하게 시작하는 게 아닌 거니까. 그리고 사랑이란 내가 꺾여서 당신에게 도달하고, 당신 역시 꺾여서 나에게 도달하는 거니까. 당신이라는 빛이 내 눈에 담기기까지의 많은 반사와 굴절들을 생각하면 오늘도 눈부시다.


gefallen은 자기 앞에 놓이는 단어에 빛을 주면서 그게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구조를 만든다. 그것은 거기에 있고, 그게 내 마음에 들어오는 구조. 당신의 자리를 먼저 만들고 그 옆에 내 자리를 조금 작게 만들어둔 듯한 문장.


또한 언어는 단지 말이나 글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바라보는 태도이자 동시대인들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도 존재한다. 단어는 그 자체로 고정된 게 아니라 시대에 따라 감각적으로 번역되고, 일상에서 새롭게 해석되며, 결국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생존하거나 소멸한다. 이처럼 단어 하나에는 그 사회의 언어 감수성, 시대 분위기, 감정의 흐름이 얽혀 있음을 황선엽 작가의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


학문적으로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판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고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언중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변화해 가는 것인데, 억지로 인공적인 신조어를 만들어서 그걸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단어가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자리를 잡아 굳어진다면 그것 또한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고유어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만 앞세운 국어 순화 사례로부터 다양한 실패 경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관련 용어를 고유어로 순화하자는 주장에 따라 하드웨어를 굳은모, 소프트웨어를 무른모라고 부르자는 견해가 있었으나 현재 이를 따르는 사람은 없지요. 굳은모, 무른모는 직관적으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데다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너무 형식적으로 직역한 느낌입니다.


공갈(恐喝)에서 공(恐)은 ‘두렵다’라는 뜻이고 갈(喝)은 ‘윽박지른다’라는 의미이니 한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공포를 느낄 정도로 위협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로 쓰이던 단어가 어느 순간 단순히 거짓말이란 의미로 쓰이게 되었을 때 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단어를 이렇게 쓰네’라고 느꼈을 당혹감과 거부감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사, 핑계, 위로, 투정, 격려와 같이 우리가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내는 말들은 모두 그 사람의 감정과 마음을 담고 있다. 어떤 이는 늘 ‘바쁘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괜찮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나 역시 누군가와 주고받는 말을 통해 상대방의 삶의 방향이나 고단함을 짐작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나는 어떤 단어들을 쓰고 그 말들로 인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보게 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익숙한 말 한마디에 깃든 리듬과 감정, 무심한 단어 속 무의식의 패턴이 우리의 방식, 곧 ‘살아가는 습관’이 될 테니까.


결국 단어는 그 사람이고,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 곧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삶을 읽어내는 일은 단지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더 나은 삶을 꿈꾸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황선엽 작가의 말처럼 '작은 궁금증 하나가 깨달음을 줄 수 있다면', 이 두 권의 책이 전해주는 수많은 단어들의 이야기 역시 우리의 인식을 조용히 뒤흔드는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단어를 들여다보는 일은, 더 깊이 있게 사는 일이고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익숙한 말을 낯설게 바라보고, 당연하게 여긴 표현 속에서 질문을 찾아내고, 관계의 반사와 굴절 속에서 내 자리를 다시 세우는 일. 어느 날 마주친 낯선 단어 하나에도,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보고 싶어진다. 그 안에 깃든 세계와 마음을,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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