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굳건히 살아남은 것들이 주는 위안
{EP12}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대뜸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를 묻는 것을 좋아한다. 좁디좁은 서울이지만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동네가 많기 때문에, 좋아하는 동네를 알면 그 사람이 대충 파악된다는 것이 나의 이론이다. 구체적이진 않아도 대략 어떤 바이브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있다. 이십여 년간 쌓아온 스몰데이터를 기반으로 살펴보자면, 강남역을 좋아하는 사람은 효율적인 사람이다. 만남에 있어서 서로의 중간 거리를 좋아하는, 한번 나갈 때 많은 걸 보기 좋아하는, 세련되고 깔끔한 새것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일 수 있다. 망원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왠지 히피스러움이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뭔가 담백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
스물다섯 이전의 나에게 묻는다면, 대학로라고 답했을 것이다. 혜화라고 답하지 않고 굳이 '대학로'라고 힘주어 대답하는 까닭은, 대학로라는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설렘 때문이다. 과거엔 서울대 캠퍼스가 모여있던 동네여서 대학로가 되었다는데, 지명의 유래만 들어도 청춘이 잔뜩 묻어난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이들의 술 취한 고백과 풋풋한 실수가 왕창 고여 있는 동네 아닌가!
아무 연고도 없는 대학로의 풋사과 같은 청춘을 '찍어 먹기'라도 해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아버지 덕분이다. 그는 젊은 시절 대학로 극단의 연극배우였는데 연극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아빠가 속한 극단에서 하는 연극을 보러 다녔다. 아빠의 단골집인 혜화칼국수를 먹으러 갔고, 잘생긴 아빠 친구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가끔은 엄마 차를 타고 술 취한 아빠를 잡으러, 아니 데리러 갔다. 아빠는 결혼하고도 자신의 청춘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종종 해무라던지 리어왕이라던지 하는 나이대에 맞지 않는 수준 높은 연극을 보기도 했다. 비록 줄거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극배우와 대학로 자체가 내뿜는 청춘은 어린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아니, 생생히 눈에 보였다. 무대에 선 사람들은 행복하고 충만해 보였다. 또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대학로는 더없이 푸르렀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어 자신을 표현하는 배우들처럼, 배고픈 연극배우여도 꿈을 좇는 것만으로 행복하는 사람들처럼, 딱 저렇게 싱그럽게 청춘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성인이 되었을 때 나의 청춘은 상상했던 것만큼 싱그럽지 못했다. 나보다 똑똑하고 돈 많고 외향적인 친구들을 보며 찌질한 자격지심에 시달렸다. 술을 진탕 마시고 흑역사를 생성할 정도로 젊음을 즐기거나, 꼭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달려가거나 하는 초록빛 청춘은 없었다. 해야만 하는 일들이 쌓여 있었고, 뒤처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그 일들을 해내야만 했다. 너무 즐거워서 현실적인 문제를 젖혀두면서까지 하고 싶은 꿈 따위 없었다. 꿈이 고작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런 내게 대학로는 여전히 청춘의 성지였다. 젊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이 꿈을 좇아 모여드는 곳이었고, 내가 바라는 삶인 동시에 내가 사는 삶과 반대인 곳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대학로를 자신 있게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대학로의 청춘은 언제나 반짝였고 나의 어두움을 대비시킬 뿐이었다.
꼬박 스물여섯 해를 살아온 지금 나의 대답은 '동묘'다. 평일 내내 성수에서 살던 나는 주말이면 성수를 떠난다. 성수동을 찾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북적북적함을 피하고자 시작된 습관이다. 성수 구길에서 2014 버스를 타면 30분 만에 손쉽게 일명 빈티지 동네에 다다를 수 있다. 빈티지 동네는 내가 이름 붙인 일종의 코스 이름인데, 신설동역 정류장에서 내려 황학동 풍물 시장을 구경하고, 동묘까지 걸어가는 루트다. (컨디션이 좋다면 동대문 일요시장도 추가된다) 이렇게 걸으면 만 보정도 채울 수 있는데, 운동 겸 쇼핑 겸 일타 쌍피를 노릴 수 있다.
그중 진또배기는 역시 동묘다. 동묘엔 온갖 사연과 시간을 짊어진 물건들이 잔뜩이다. 20년간 정리하지 않은 서랍장을 탈탈 털어온 것 같을 정도로 잡다한 물건들을 쌓아놓고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손때 묻은 인형이라든가 변색된 가죽 가방이라든가, 색 바랜 LP판이나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VHD 형식의 영화라든가, 망가진 필름 카메라라든가 … 오래된 물건이 쌓여 만들어진 산을 보면 가끔 실제로 팔기 위해 가져왔다기보다는 전시하기 위해서 가져온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이런 물건들은 낡았을 뿐만 아니라 망가진 경우도 많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물건을 판다는 건 퍽 웃기다. 애초에 작동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목적인 걸까.
이렇게 오랫동안 굳건히 살아남은 것들을 보며 안식을 얻는다. 아니, 비록 지금은 쓸모없더라도 아직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보며 안식을 얻는다.
오래된 물건들을 보면서 물질의 유한함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과거에 최신이라고 불리었던 것들이 이제 아무도 찾지 않게 된 것을 보면서, 세월 앞에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느끼는 것이 좋다. 그럼 오히려 흐르는 시간 속에 우뚝 설 수 있다. 나를 둘러싼 물질들에 연연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를 둘러싼 문제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느낀다. 확실히 오래된 것들이 주는 위안이 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새것이라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빈티지 옷을 좋아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광장 시장에 가서 티셔츠를 산 것이 나의 첫 빈티지 경험이었다. 보풀이 살짝 인 까만 티셔츠였는데 브랜드도 없는 옷을 당시 만오천 원이나 줬으니, 단단히 호갱 당했다. 어쩌다 강매를 당하는 바람에 사 오긴 했는데, 티셔츠에 귀신이 들려있을까 봐 찝찝해서 결국 입지 못하고 버렸다. 물론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통돌이 빨래를 거치면 옷에 씌어있던 귀신도 혼이 쏙 빠져 하늘로 승천하지 않을까. 빈티지 옷은 사탕 껍질 같은 요새 옷과 달리 튼튼하다. 박음질과 소재가 얼마나 튼튼하면 수년을 이곳저곳 배회했을 텐데 아직까지 탄탄할까. 유니크한 디자인으로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날 리 없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책도 중고 책이 좋다. 빳빳해서 손에 쥐는 대로 상처를 입는 새 책보다는, 이미 손때로 부드러워져 어떻게 쥐든 자연스럽게 낡아가는 중고 책이 좋다.
그래서 성수구길에서 사는 지금이 좋다. 최신 유행 브랜드 팝업 스토어가 일주일 간격으로 바뀌는 연무장길 보다는, 유행 지난 유행가에서 따온 상호를 가진 맥줏집('머니! 뭐니?')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수구길이 좋다. 길고양이 3대가 터를 잡고 행복하게 사는 성수 구길이 좋다. 60년 된 뚝도 시장이 있는, 아버지의 가게를 딸이 대를 이어 운영하는 맛집이 있는, 오래된 낮은 건물들만 있어서 노을이 잘 보이는 성수 구길이 좋다. 하루에 8시간을 보내는 회사가 빛깔 번쩍한 강남에 있기에 더더욱, 우리 동네의 고즈넉함이 나를 치유해 준다. 오래된 건물과 오래된 사람들. 시간이 고여있는 동네가 좋다. 몇 년 뒤의 나는 또 무어라고 대답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러하다.
ps. 여러분들은 어떤 서울 동네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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