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열흘이 넘었다. 한 때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겨뤘던 러시아와 유럽 최빈국 우크라니아 간의 전쟁 – 더군다나 푸틴이 서방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결정하고 준비한 전쟁이라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의외였다.
러시아는 개전 첫날 우크라니아 군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키기 위한 선제타격 후 기계화부대를 중심으로 다방면 동시 공격을 개시해, 3~4일이면 와해될 줄 알았던 우크라니아가 아직도 건재하다. 젊은 지도자의 리더십, 국민들의 저항의지, 세계 여론의 지지와 서방의 지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겠지만 전쟁사를 공부했던 나로서도 궁금하다.
오늘 아침에는 우크라니아 동북부 요충도시 하르키우를 ‘스탈린그라드 항전’처럼 결사항전을 하자는 뉴스가 보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 세계대전시 우크라니아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서 독일-소련 간 벌어진 결전이었는데 충분히 음미할 만한 내용이라 알아보자.
볼고그라드로 개명된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하류에 위치한 러시아 남부의 중심도시다.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볼가강을 연해 북에는 레닌그라드(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개명), 중앙에는 모스크바,남에는 스탈린그라드가 위치한다. 레닌과 스탈린!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두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을 붙인 이 도시들의 중요성을 대변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대불, 대영 전쟁에서 여유를 찾은 독일군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1941년 6월 공격을 개시했다. 모스크바와 북부, 남부 세 방향으로... 모스크바와 북부는 정치, 군사적 목적 달성을 위해, 남부는 우크라니아 곡창지대와 코커서스 유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전쟁수행 역량을 분산시킨 과오로 군인들의 건의를 무시한 히틀러의 독단이었다.
전쟁 초기 독일군 남방 집단군의 작전은 순조로웠다. 현 우크라니아 수도인 키예프 포위전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군 포로 66.5만 명,전차 890대와 야포 3,700문을 획득했다. 결정적 목적지인 코카서스 방향으로의 작전에서 문제가 생겼다.
히틀러가 목표를 분리함으로 두 주력부대 간 간격이 발생하고, 부대를 무리하게 운영하여 공세 유지가 어려워졌다. 예하 6군은 돈강을 연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였으나 상황은 불리해졌다.
한편 쥬코프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군은 결사항전의 각오로 독일군의 돈강으로 공격을 저지하고, 독일군의 약점인 간격을 파고들어 측면을 공격하며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한 6군을 포위했다. 독일은 전선을 조정하고 6군을 퇴각시킬 수 있었으나 히틀러가 직접 스탈린그라드 사수 명령을 6군 사령관에게 내리고, 인접부대로 구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무리한 작전이었다.
포위된 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70일을 버티다 항복을 했다. 30만 명의 인명손실과 차량 6만 대,전차 1,500대,화포 6,000문을 상실하였다. 소련군은 이보다 더 많은 피해를 감수하며 돈강 너머로 독일군의 진출을 막았고 자신들의 지도자 이름을 가진 도시를 탈환했다. 결국 이 전투는 독일군의 공세 종말점이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우크라니아 지도자들이 동북부 요충도시 하르키우에서 ‘스탈린그라드 항전’처럼 싸우자란 말은 결사항전을 하여 국경선을 지키고 러시아군의 공격 기세를 꺾자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적에게 우리 의지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했다. 적의 의지를 꺽지 못하는 전쟁은 우월한 군대를 가졌어도 이기지 못한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그랬고,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도 그랬고, 월남전의 미군이 그랬다.
체면을 구긴 푸틴이 뭔가를 새로이 준비하는 듯한데 우크라니아 국민들이 버텨내기를 기도한다. 우크라니아 대사관 계좌에 적은 액수지만 보냈다. 그들이 힘겨운 항전을 하는데 적은 도움이라도 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