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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냇물 Apr 10. 2022

38선과 휴전선이 다르다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장학사가 참관하는 사회과 시범수업 중 선생님이 ‘6.25 전쟁이 끝나고 남북의 경계를 지은 선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여러 학생들이 저요! 저요!’ 손을 드니 나도 덩달아 들었다. 근데 선생님이 나를 지명했다. 큰소리로 ‘38선입니다!’라고 오답을 했던 쑥스러운 추억이 있다. 믿고 나를 지명한 선생님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에서...     


38선과 휴전선! 알 듯 모를 듯 약간 헷갈리는 두 선을 알아보자. 둘 다 모두 분단의 상징이며 통일의 장애물이다. 그러나 완전히 다르다. 38선은 우리가 힘이 없어 다른 나라들이 우리 민족을 갈라놓은 경계선이며, 휴전선은 5년 뒤 북한의 남침에 의해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 전쟁의 결과물로 나타난 다른 분계선이다.    

  

먼저 38선은 1945년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89일 히로시마, 12일 나가사끼에 원폭 공격을 받은 일본이 항복 의사를 전해온 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급히 설정한 선이었다. 우리나라는 그 당시 일제 치하 식민지 상태였었다.      

38선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대일전 참전 명분으로 한반도에 진입한 소련군의 완전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주도로 만들었다. 


미 국방성 본스틸 대령이 한국지도를 보고 남북 중간을 지나며 한반도의 중심인 서울과 인천항이 포함되었기에 기안을 하고 미국 수뇌부가 승인하였으며 소련이 동의해서 탄생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작전 관할 구분선으로 북위 38도선을 말한다.         


선이 남북 분단의 단초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38선을 구분하는 이 조치가 없었다면 대일전 참전 명분으로 812일 이미 두만강을 넘은 소련군과 그 시각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의 한반도 진군 레이스의 결과는 뻔하다.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선점하였을 것이고 소련군 통제하 일본군 무장해제가 되고 군정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여튼 이 38선은 남북 분단은 물론 이념대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 선은 1950625일 북한 기습남침으로 무력화되었다. 


3일 만에 서울 함락과 무질서한 후퇴, 낙동강선 최후 방어, 인천 상륙작전과 반격, 38선 돌파 및 압록강 도달, 중공군 참전 및 1.4 후퇴, 서울 재탈환... 숨 가쁘게 이어지던 전쟁은 19515월 말부터 소강상태였다. 사실 이 5월 말 전선은 오늘날 휴전선과 비슷한데 세부적으로는 조금 다르다.      

 

하여튼 휴전이 발효된 195372710:00 기준 양측의 점령지역을 기준으로 휴전선이 설정되었고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38선은 위도선이라 한반도 중간을 직선으로 관통했는데, 휴전선은 동해안은 북으로 훨씬 더 위로 올라간 형태다! 왜 그럴까? 전쟁의 결과물이며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목숨으로 확보한 영토선이다.       


그 사연은 전황을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낙동강 방어선에서부터 동부 산악지역은 한국군, 서부 개활 지역은 미군이 작전을 담당하였다. 반격작전 간에도 그 틀은 유지되었다.    

  

휴전회담은 지루하게 이어졌는데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첫 이슈는 유엔군은 새로운 군사분계선을 주장했고, 공산 측은 기존 38도선으로 회귀 주장이 팽팽히 맞서다. 실랑이 끝에 어렵사니 휴전 발효 당시의  접촉선으로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로도 포로 문제 등 여러 이슈 때문에 18개월 후에야 최종 휴전 합의가 이루어졌다.       


현 접촉선이 휴전선이 된다는 이슈에 한국군과 북한군은 예민했고, 미군과 중국군은 다른 심산을 가졌다. 휴전이 확실해가는 상황에서 외국에 나와서 희생을 당한다는 게 미군이나 중공군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포진한 서부전선에서는 전반적으로 전투가 소강상태였다. 수세적 입장의 중공군은 말할 필요도 없고, 전투력이 강한 미군도 격전을 피하고 회담의 파국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동부전선은 확연히 달랐다. 통일의 염원을 가진 한국군은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했고 북한군도 비슷한 입장일 것이다. 능력상 대규모 작전은 제한되고 백마고지,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저격능선, 펀치볼 지역, 월비산 등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단장의 능선이 미 종군기자가 한 한국군 부상병이 벌벌 떨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heart break)’며 고통스럽게 부르짖고 있다고 보도한 기사에서 유래하였고, 백마고지는 서로 고지를 뺏고 뺏기기를 12회 하였다 하고, 푸른 산이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얗게 변해 백마고지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이 고지 쟁탈 전투들의 격렬함을 상징하고 있다.    

     

양양 기사문부터 고성 통일전망대까지는 전쟁을 통해 새로 우리 땅이 된 수복지구다. 화진포와 영랑호 같은 호수와 곳곳의 해변, 설악산 비선대와 울산바위 같은 천하의 비경들이 즐비하다. 6.25 참전용사들과 호국영령들이 목숨을 걸고 새로 찾은 우리의 땅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좋은 나라 만들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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