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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May 19. 2023

사랑, 천국만은 아닌

이도우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읽고

#사서함110호의우편물 #이도우



몇 년 만에 머리를 길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머리카락 끝이 슬슬 어깨에 닿는다. 언제부터 내가 단발머리를 했더라. 예전 사진을 찾아보았다. 이십 대 중반에는 양 갈래로 땋아도 쇄골뼈 아래까지 내려왔다. 그때 길이를 손으로 가늠해 보다가, 문득 예전에 만나고 헤어졌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새롭게 눈에 들어 설렜던 첫 만남, 가까워지고 싶어 조심스레 손 내밀었던 순간들, 조금씩 달콤함에 익숙해져 포근함으로 바뀌던 날들, 자꾸 서로를 찔렀던 가시 돋친 차이들, 언제나 쉽게 아물지 않았던 이별. 사랑은 사뿐 날아올랐다가 상처를 입고 가라앉곤 했다. 



장편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의 주인공들은 쓸쓸하고 힘들어도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진솔과 건, 선우와 애리의 마음은 마주쳤다가도 종종 엇갈리고 어떨 때는 아프게 갈라진다. 건은 이제는 '깊이 생각하기 싫어서 몇 년 전부터 생각을 안하고 있는 상태'(p.199)라고 말한다. 생각 안 하고 살면, 생활이란 건 또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고. 진솔은 '그런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고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p.325)고 느낀다. 사랑은 이들에게 결코 천국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나에게도 사랑은 늘 기쁨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이의 마음을 알 수 없던 때에는 연락 하나에도 핸드폰을 몇 번씩 들었다 놓았다. 지금 카톡 하면 이상할까, 답장이 오지 않는데 어쩌지, 다시 만나자 말해도 될까, 그렇게 자주 머뭇거렸다. 상대방에게 예상치 못했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마음을 정한 건 아닌가 주저했고, 나의 어두운 면을 보고도 나를 좋아할지에 확신이 서지 않아 낮게 웅크렸다. 어느 순간 데이트가 해야 하는 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 가슴 한구석이 서글프게 저릿했다. 


"당신 말이 다 맞다고 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거 다 알고서, 사랑해보자고 한다면?"(p.416)


나는 배우자를 떠올리면, 불타는 사랑이라기보다 잔잔한 애정 또는 나름의 동료애를 느낀다. 그래서인지 '사랑'을 말하는 이 구절에서 예전 애인들과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자꾸 불편하게 만드는 추억 속 뾰루지가 여럿 만져졌다. 상냥했던 미소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변했던 때. 뭐든 품어줄 것 같았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내 모습에는 곁을 주지 않았던 때. 몸을 기대면 믿을 수 없이 달콤해도 결국 이별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는, '사랑'으로 건너가는 다리로는 다소 위태로워 보인다. 



소설 속 진솔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순간은 내리는 눈이나 바람이나, 담 밑에 피는 꽃이나... 그런 게 더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거. 그게 사랑보다 더 천국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거. 나, 그거 느끼거든요?'(p.416)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조곤조곤 피어나는 매화와 환하게 흩날리는 벚꽃에 구멍 난 마음을 메웠던 날들을, 나도 기억한다. 좋아한다는 말은 서툴러도 그저 충만했는데, 헤어지자는 말은 어떻게 해도 쉬이 괜찮아지지 않았다. 빛바랜 추억이 되어버린 사랑의 기억을 곱씹으며, 나는 올해에도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꽃잎에 손을 뻗었다. 



#인북 #문학살롱 #문살 #문학살롱_사서함110호의우편물 #로맨스 #연애소설 #장편소설 #북스타그램 #서평 #대체텍스트 



연한 분홍색 바탕에 이미지 좌측 상단과 우측 하단에는 벚꽃이 가득 피어 있다. 이미지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커다란 핸드폰이 있고, 핸드폰 화면에 책 표지가 띄워져 있다. 책 표지는 연한 분홍색 바탕이다. 표지 상단 중앙에는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이도우 장편소설'이 있고, 그 아래 진한 분홍색인 한강 다리와 다리가 강물에 비치는 모양이 그려져 있다. 표지 하단 중앙에는 출판사 로고인 '시공사'가 있다. 핸드폰의 왼쪽에는 커다란 꽃이 한 송이 있고, 이미지 좌측 하단에는 '글로 나는 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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