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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an 24. 2023

새해 답안지는 주관식이면 좋겠습니다

흑백논리를 넘어서


'힘을 가진 중간자는 존재하는가'에 대해 글을  적이 있습니다. 상하 또는 좌우, 어떤 분야든 쪽 중 한쪽이 아닌 중간에 위치하는 게 가능한지, 나아가서 합당한 지에 대한 자문이었습니다. 그 글의 끝에 이르러 스스로 사용했 '중간자'라는 단어를 '중첩자'바꾸게 됐습니다.


이솝우화 속 박쥐를 위한 변론


회빛의 눈부심 빗대본 적도 있습니다. 흑과 백 사이, 고착무색무취가 곧 정체성일 것 같은 회색이 사실은 얼마나 다채롭고 무한한 그래데이션의 세상인지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눈부신 회색지대


지난 오랜 기간 적어놓은 SNS 프로필란의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건전한 다양성을 지지합니다


네. 다양성을 지지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발붙여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에서 다양성이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첫째, 다양하면 다 괜찮나?

문구에 '건전한'이라는 궁색한 수식어가 붙은 건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둘째, 건전한지 아닌지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나?

어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잣대라도 존재한까요? 제게 무슨 특별한 권한이 주어진 것도 아니지요. '지지하다'라술어문장을 맺은 건 어쩔 수 없는 개인의 자의적 선언임을 인정했때문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다양성을 지지한다면 다양하지 않음 또한 다양함의 하나로서 배제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아이코. 빠져나올 수 없는 역설의 늪 기어코 빠져버렸습니다. 악명 높은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패러독스.


이럴 땐 프랜시스 베이컨의 <극장의 우상>에 기대야겠습니다. 저명한 소환해서라도 말이죠. (베이컨 운운하며 진작 시작했습니다만)


자칭타칭 천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젊은 시절의 명작 《논리철학논고》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로서 존재한다면 세계라는 집합이 다시 스스로를 그 원소로 갖는 -세계 자체가 사실이므로-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고 따집니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것이지요. 조금 쉽게 바꾸자면 '나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사고할 수 있다'라고 할까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그 유명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입니다. 그런데, 그래 놓곤 나이 들어 쓴 《철학적 탐구》에서 본인의 주장을 수정하지요. '일상언어'는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쓰임새의 맥락에 따른다면서 말이죠.


천재도 요리조리 말을 바꾸는데 -스스로를 수정할 줄 아는 것도 대단한 용기입니다-, 비트겐슈타인과 비슷한 구석이 1비트도 없는 평범한 개인으로서 다양성이란 뫼비우스의 늪을 어떻게 헤쳐 나와야 할까요? 세기말 펜티엄급 CPU에서 크게 업그레이드된 적 없는 두뇌이지만서도, 이 지점에서 과감하고 호기롭 0과 1이 중첩된 양자컴퓨팅을 시도해 봅니다. 


다양성은 가능성을 열어둡다.

한쪽에 치우쳐 한쪽을 내치지 않습니다.


다양성은 개별성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구별된 개성과 그들의 호혜적 조화를 긍정적으로 구별할 줄 압니다.


다양성은 극단성을 지양합다.

모 아니면 도필요할 때가 있죠. 그런데 개 걸 윷 심지어 빽도가 큰일낼 때도 있습다. 고체 액체 기체, 상(phase)은 단 세 가지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요플레는 액체인가요 고체인가요? 슬라임은요? 아말감은요? 졸(sol)이 겔(gel)이 되고 겔이 졸이 되는 건 어떤가요? 다양성은 유연합니다. 다양성은 변화합니다. 다양성은 중첩합니다. 버섯은 식물일까요 동물일까요? 바이러스는 생물일까요 무생물일까요? 무지개는 일곱 빛깔일까 일흔일곱 빛깔일까? 우주의 모든 빛을 한데 모으면, 그 궁극은 정녕 까요 검을까요?


진정한 다원주의는 극단적이지 않습니다. 극단적일 수가 없습니다. 극이 없으니까요. 북극과 남극이 있다면 동극과 서극이 없으리란 법도 없겠죠. 사실상 지구상의 모든 지점이 제각각 모두 극점임을 주장한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지구는 둥그니까요.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6년 영화 《컨택트》에는 -원제는 Arrival입니다- 화선지 같은 스크린에 둥글게 난을 치는 문어발 외계인이 나옵니다. 수묵화를 즐기는 이들은 헵타포드 -다리가 8개 아니고 7개입니다- 라고 불립니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석하고 싶은 과학자들은 비포&애프터를 열심히 따져보지만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습니다. 이 경이로운 외계생명체에게 시간이란 원과 같기 때문이지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돌고 돌아 통합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이란  엔트로피의 일방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현재까지의) 인류에게만 해당되는 한계인 건지도요. 그래도 있는 힘껏 열심히 따져 온 옛사람들은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卽變 變卽通 通卽久)라는 말로 우주의 원리를 표현했습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도 있지요. 끝으로 면 되려 끝이 나지를 않습니다. 끝이 되면 변합니다. 변하면 뒤집힙니다. 뒤집히면 다른 쪽으로 다시 나오게 되지요. 동전의 양면을 꿰뚫는 웜홀처럼 끝과 끝은 통합니다.


자연이 바로 그렇습니다.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달리면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뼈 같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죽은' 상태에서 다시 새로운 순이 ‘태어’납니다. 생애 주기의 정점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새해 묵상해 보기 딱 좋은 주제네요.) 한 시점이 다른 시점을 배척할 수 없습니다. 과정의 모든 단계가 필요합니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어서 우리는 선순환할 수 있습니다.


선택이 의미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어떤 선택도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선택하되 획일하지 않은 것이지요. 주장하되 배제하지 않고요. 나아가되 비선형의 자유도가 있습니다.


세상에 정답은 없습니다. 답을 찾아가는 해답의 과정이 수없이 있을 뿐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객관식도 사지선다(四枝選多)지 사지선답(四枝選答)이 아닙니다. (여기서 다(多)는 '낫다'의 의미입니다) 다원주의는 다양한 풀이들을 긍정하며 더 나은 해답을 찾아가는 노력입니다.


삶은 예술입니다. 각자의 삶이 각각 예술입니다. 지난 삶처럼 지날 삶들도 예술이 될 것입니다. 콜라주처럼 겹치고 몽타주처럼 쌓이면서 말이죠.


가두지 말고 통하면 좋겠습니다.

나누지 말고 더하면 좋겠습니다.

가르지 말고 겹치면 좋겠습니다.


새해 답안지는 주관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성은 주관식입니다. 


그런 다양성을  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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