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9월 20일 월요일
자식들을 만날 수 있는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들은 바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가장 잘 먹는다고 생각하는, 또는 그 음식을 먹는 걸 한번 본 후로 코다리 찜과 깻잎조림을 만들어서 소포장하여 냉동실에 얼려둔다. 장모님은 사위가 즐겨먹는다고 생각하는, 또는 그 음식을 잘 집어먹는 것을 본 후로 명태를 갈가리 찢어서 고추장 양념에 한 그릇 버무려둔다. 정작 본인들은 그것을 즐겨먹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것보다 입에 조금 맞았을 뿐일지라도 시어머니와 장모님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음식 생각뿐이다. 매년 명절마다 먹는 음식은 이렇게 비슷비슷하다.
어제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친정으로 가서 엄마 얼굴을 보고, 저녁에는 언니 집으로 가서 조카와 맥주를 마시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언니 집의 화장실 더러움을 끝내 외면할 수 없어 세제와 청소솔을 들고 닦았다. 지난 5월에 와서 내가 청소해 준 이래,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언니네 화장실은 내가 올 때마다 때를 벗겨내는 중이다.
쇼핑을 하고 싶어 하는 딸들을 만나기 위해 성신여대로 향했다.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짐을 쌌는지, 교통카드도, 갈아입을 속옷도 안 챙겼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카드를 구입하고 보증금을 환급받았고, 버스를 갈아타도 할인 혜택을 받을 수도 없으니 상당히 불편했다. 버스를 탈 때 2천 원을 내고 거스름 돈을 받아보고는 요즘 서울 버스 요금이 1300원인 것을 알았다. 너무 오랜만에 서울을 돌아다니는 것인가.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서 갈아타는 곳을 헤매기도 했다. 카드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 대가로 지갑 속은 동전으로 가득했다.
홀로 아이들을 기다리며 성신여대 정문에 있던 한옥 스타일의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바로 이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정말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혹시나 집에 있으면 나와서 말동무나 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근무를 하러 출근을 한 상태였다. 그 집 초등학교 딸내미네 반에 확진자가 있어 딸아이가 자가 격리에 들어가 있었다. 여러모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바로 우리 근처에 손을 뻗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점심을 먹으러 간 작은 스파게티 가게에서 코딱지 만한 화장실의 더러움과 카운터로 건너 보이는 주방 전자레인지의 까만 찌든 때가 눈에 들어왔다. 직업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거 같다.
9월 21일 화요일
정말 짧은 연휴를 보내고 아침에 서울을 떠나 집으로 출발했다. 읍내에 도착하자마자 보건소로 가서 가족 모두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자발적으로 검사받으러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말 잘 듣는 한국 사람들 같으니라고. 다행스럽게도 이번 검사는 지난번보다 조금 덜 아팠다.
9월 22일 수요일
생일 맞은 둘째 딸이 서울에서 못다 한 쇼핑을 하겠다며 읍내로 나갔다. 옷 매장이 몰려있는 사거리에는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재난지원금을 쓰겠다고 나온 건지, 연휴에 얻은 보너스를 풀겠다고 나왔는지, 바글바글했다.
9월 23일 목요일
연휴 끝 재봉 모임의 날이다. 회원이 달랑 한 명 왔다. 정말 오랜만에 수다는 조금 쉬면서 올해의 주력 작품 주방장갑을 한 쌍 완성했다.
민감독은 차 키를 잃어버려 운전을 못한 지 이틀이 되었다. 열쇠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읍내에는 없어서 다른 곳에서 열쇠업자가 오기로 했다고.
오후에 초등학교 교사 숙의 전화를 받았다. 내일 필요한 쿠키를 주문하겠다는 내용이다. 매일 진열해 두는 쿠키가 아니기 때문에 사전 주문을 해야 비로소 굽기 시작한다. 냉동고에 남아있는 쿠키 반죽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9월 24일 금요일
치매예방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보건소에서 사진전을 기획했다. 내용인즉,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찍은 인증사진을 액자에 걸어서 전시를 하겠다는 것. 지난주 이 기획 건으로 담당자와 포토박이 미팅을 했었다. 포토박이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받은 사진을 보정해주는 것뿐인데, 카톡으로 보내면서 용량은 작아지고, 보낸 사람 임의대로 사진 사이즈를 축소하거나 늘려놓아 상태가 좋지 않아 손 대기 힘들어 거절을 했었는데, 다시 담당자가 제발 해달라고 매달리고 있다. 행사의 질이 좋든 아니든, 다음 주 목요일에는 꼭 전시를 열어야 했던 것이다. 행사가 열렸다는 인증만이 필요한 것 같다. 결국 맡아서 작업하기로 하고 견적서를 세 번이나 수정하면서 발송 완료했다. 관공서이다 보니까 100만 원이 넘어가는 일은 요구하는 서류가 너무 많아 100만 원이 넘지 않는 선에서 비용을 책정했다.
9월 25일 토요일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논을 보며 출근을 했다. 제법 선선해진 날씨, 그러나 낮에는 더워서 여전히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데, 아침이라 출입문을 활짝 열고 가을바람을 들여보냈다. 유튜버 H녀의 ‘한강에서 들으면 좋은 음악’을 읍내 카페에서 들으며 오픈 준비를 했다.
여름 내내 잘 팔았던 설의 역작 ‘팥빙수 셰이크’가 추석 연휴 동안 재료를 다 써서 메뉴에서 사라졌다. 병에 조금 남아있던 팥을 박박 긁어서 마지막 팥빙수 셰이크를 만들어 모닝커피 대신 쪽쪽 빨아먹었다. 25개 들이 연유를 사서 3개가 남았으니 재료 낭비도 거의 없었던 이 음료는 이제 내년 여름을 기약해본다.
바닐라라테 러버 성이 왔는데 잠시 단골 이름을 잊어버려 전화번호 뒷자리를 불러달라 했을 때 조금 미안했다. 2호 카공족이 왔을 때는 이름이 떠올랐지만 건실한 카공족은 항상 전화번호와 이름을 함께 말해주기 때문에 잊어버려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에 있는 큰딸은 최신 휴대폰을 장만하기 위해 오늘부터 주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학 신입생이 되면서 가장 최신 휴대폰을 이미 가졌는대도 만족을 모른다. 20 대란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맘껏 누리며 살 수 있는 때라는 걸, 지금 깨달았기에 망정이지,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면 학생 신분에 어쩌고 저쩌고 잔소리를 한 바가지 쏟아냈을 거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스스로 벌어서 사면되지, 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르바이트를 격려해주었다. 아마도
몇 달 걸려야 그 돈은 마련될 것 같고, 그래서 새로운 핸드폰이 생기면 그녀가 쓰던 핸드폰은 막내에게로 전달될 것이다. 곧 막내가 나머지 세 식구를 앞질러 최신형 휴대폰을 갖게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