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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슴슴하게씀 Nov 28. 2021

당신의 기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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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오빠, 벌금 엄청 많이 내네요. 책만 열심히 봐도 벌금 낼 일 없는데.” 정연이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건 맞긴 하지. 얘는 진짜 맞는 말만 해서 얄미워.”

“얘 요즘 이상한 사이비에 정신 팔렸어.” 재현이 끼어들었다.

“무슨 그 얘길… 그런 거 아니야. 얘들아, 들어봐.” 지훈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조원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아는 재현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에 반해 조원들은 그의 이야기에 폭소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다.

“어? 뭐야, 어제 9시? 그 할아버지 나도 본 것 같은데?” 가만히 듣고 있던 정연이 입을 열었다.

“어제 공부하다가 집 가는 길에, 벙거지 모자 푹 쓴 할아버지랑 부딪혔어요. 모자를 너무 눌러써서 앞이 잘 안 보였나봐. 부딪히더니 제대로 보지도 않고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고개 몇 번 숙이더니 그냥 가던데. 어디를 급하게 가는 것 같더라고. 맞아. 그러고 보니까 나도 약 냄새 맡았던 것 같아.”

목격자 셋은 각자가 본 노인의 인상착의를 맞춰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치했다.

지훈은 의구심이 들었다. 초시생인 정연은 머리도 좋고 엉덩이도 무거웠으며 자신만만했다. 모의고사 성적도 잘 나왔다. 학원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합격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애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친다고? 지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근데 왜 정연이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지? 똑똑하고 열심히 하고. 제일 될 것 같은 앤데.” 재현이 지훈의 생각을 들은 것처럼 그대로 말했다.

“이, 공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 남다른 기운을 본 거야 그 할아버지가. 무자비하게 돈 걷어가는 이모한테 보이지 않는 기운을 우리한테 본 거라고.” 지훈이 거들먹거리며 장난을 쳤다. 진심이 조금 섞여 있었다.

“뭐야, 재수 없어.” 정연이 웃으며 받아쳤다.

“들어 보니까 우리 사촌 형이 얘기한 거랑 비슷한데요. 그 형이 한 10년 전에 노량진에서 공시 준비했었거든요.” 조원 중 한명이 이야기를 꺼냈다. 정연을 향해 바싹 다가간 지훈의 몸이 그에게 홱 돌아갔다.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하면 그에게 소리라도 지를 것만 같았다.

“10년 전에 노량진에서 공부할 때 그런 할아버지가 있었대요. 인상착의는 잘 모르겠고, 지나가다 마주치는 수험생한테 대뜸 그런 말을 해요. 기운이 좋다고. 그러고 그냥 가버린다는 거야. 그러면 그 수험생은 일이 잘 풀렸대요. 고시든, 회계사 시험이든 합격이고 하다 못해 토익 준비하던 애들도 만점 나왔다던데. 그때 당시에 심란한 노량진 수험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노량진 역에서 사육신공원까지 배회하고 난리였다더라고요. 누구는 여의도까지 갔다나, 뭐라나.”

“그래서? 뭐 하는 사람인지 밝혀졌어?” 다른 조원이 물었다.

“아니, 어느 날부터 안 나타나더래. 그러니까 더 미스터리지. 실제로 여의도에서 의원들 상대로 용한 점쟁이라고도 하고, 안목이 탁월한 늙은 투자자라고도 하고… 소문만 파다했는데, 당사자가 끝내 안 나타나니까 팍 식었죠. 그 사람이 이 할아버지인가?”

“야, 진짜? 그럼 나랑 재현이 이번에 합격이야?”

“야, 그냥 미신이야, 미신.” 말과는 달리 재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 새끼 이거 신났어. 내가 유재현 몇 년 봤는데, 지금 이 표정이 제일 최대로 즐거운 표정이야. 이거 지금 로또 당첨된 표정이야. 정연아. 우리 면접 스터디 하자.”

“오빠, 철 좀 들어요.” 정연이 꺄르르 웃으며 지훈의 어깨를 탁 쳤다.

“좋아서 그래, 정연아. 너는 머리 좋아서 명문대 나오고, 그냥 부모님이 해보라 해서 시작했는데 잘 풀리잖아. 우린 몇 년 째야. 내년엔 서른인데 이번에 안 되면 포기해야 되나 싶다. 근데 누가 합격할 거라 해주니까 얼마나 좋니? 정연아. 내가 빨리 합격했으면 장가 가서 벌써 너만한 애가 있을 텐데.”

“아버지, 그럼 좀 앉아서 진득하게 공부 좀 해.”

“너는 그, 맨날 맞는 말만 하는 거 고쳐야 돼. 사람이 어떻게 하루 종일 앉아만 있냐. 응?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는데. 야, 됐다. 너만한 애 없어서 다행이다.”

“그럼 꾸준히 벌금 내고 우리 소고기 사줘요. 아빠. 밥이나 먹으러 가요.” 정연이 짐을 싸며 대꾸했다. 둘의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조원들이 꺽꺽 웃었다.

“아빠 오늘 미은쌤이랑 미팅 있어. 오늘은 너희들끼리 먹어라.” 지훈은 혼자 상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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