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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털어놓은 미은은 말이 없었다. 노인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카페에 도착한 지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노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은의 옆에 앉아 있는 노인이었다. 둘은 테이블의 한쪽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얼떨떨한 표정의 재현이 있었다. 지훈은 영문을 모른 채 재현의 옆에 앉았다. 지훈은 약재 냄새가 노인의 앞에 놓인 차에서 나는 냄새임을 깨달았다.
미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훈과 조원들이 본 노인이 미은의 아버지였던 것, 노인이 인사동의 허름한 찻집 주인인 것, 자신감이 떨어진 재현을 미은이 안타깝게 여겼던 것, 수험 생활 때 돌았던 소문을 떠올린 것, 그것을 이용해 재현의 자신감을 북돋아주려고 한 것, 노인이 지훈과 재현을 착각하고 만 것, 예상과 달리 집중하지 못하는 지훈과 재현을 보고 낭패라고 생각한 것. 망가져 가는 지훈의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 미은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과했다. 노인은 제 앞의 차에 손도 못 댄 채 퀴퀴한 마루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너희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든, 정말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미은의 자백에 재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쥐었다 폈다, 맞잡았다가 또 얼굴에 갖다 댔다.
“너희들 시험 얼마 안 남았는데, 이렇게 소중한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그치만, 너희들은 정말 합격할 만큼 충분히 열심히, 또 잘 해온 아이들이야. 때가 안 맞았을 뿐이야. 그게 안타까워서 그랬어. 지금이라도 날 용서해주고, 다시 공부에만 집중해줄 수 있겠니?”
정적이 흘렀다. 미은은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집중한다고… 될까요?” 지훈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동안 할아버지 쫓아다닌 거, 저도 느끼고 있었어요. 멍청한 짓이라고.” 붉어진 지훈의 얼굴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 지훈을 다른 이들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 요즘, 매일 밤마다 불안해서 잠이 안 와요. 하루하루 머리 굳는 게 실감이 나서요. 까놓고 말해서 이 나이에 이거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데…”
“지훈아, 그렇지 않아.”
“솔직히 선생님이 도와줘서 그렇지, 저 진작에 학원 잘렸어야 했잖아요. 이런 장수생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한번만, 딱 한번만 더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뻔뻔하게 남았는데요. 차라리 그때 포기할 걸 그랬어요. 동기들은 다 취업했거나 최소한 경력이라도 있는데요. 저는, 그냥 실패자에요. 면접 보러 가서, 저 그냥 졸업하고 공시 준비나 하다가 안 돼서 포기하고 온 놈입니다. 자격증 없고요. 인턴, 공모전 경험 없습니다. 이 말을 잘 꾸며서 할 자신이 없어요. 면접장에 앉아있는 상상을 해봤는데요. 거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숨이 막히더라고요.” 그는 토하듯이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다. 미은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한 마디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라는 걸 알면서… 병신같이 끝까지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 흐느꼈다. 모두가 얼어붙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 노량진에서 공부하셨을 때, 그런 할아버지가 있었단 건 사실이죠? 그쵸? 그건 사실인거죠?” 그의 울먹임에 가까운 질문에 미은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의자가 드르륵 끌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는 미은과 노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