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왜 퇴근길에 만두를 사 오셨을까?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 가끔씩 늦은 밤 아버지가 사들고 오신 만두 상자가 생각날 때가 있다.
얇은 나무곽에 감겨있는 노란 고무줄을 풀어 상자를 열었을 때, 모락모락 퍼지는 김과 함께 뒤섞여 올라오는 찐만두와 나무상자의 향기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시큼한 단무지 냄새와 함께 찐만두 향기가 올라오면 늦게 퇴근하신 아버지에 대한 반가움은 입에 고인 침과 함께 꿀꺽 삼켜버리고, 만두 하나를 냉큼 입에 넣고 육즙 풍부한 고기소를 씹으며 마냥 행복해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왜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내가 좋아하는 만두를 사들고 오셨는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제 나도 유독 시달렸던 하루의 끝자락엔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들고 퇴근하곤 한다.
남편의 휴일 간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친구 은영이로부터 케이크 쿠폰과 함께 카톡이 날아왔다.
“크리스마스인데 애들 케이크이라도 사줘”
나는 그제야 크리스마스 인걸 깨달았다.
집 앞 파리바게트에 들렸다.
병원의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던 콧구멍으로 달콤한 버터 냄새가 들어가니 아이들이 더 빨리 보고 싶어 졌다. 눈에 띄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하나 골라 서둘러 집으로 갔다.
집에는 여섯 개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나를 반기며 달려왔다.
나는 아이들을 안고 케이크를 내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은영이 이모가 케이크 사줬어!"
아이들은 케이크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팔짝팔짝 뛰며 재잘거리는 세 아이들의 기쁨이 나에게까지 밀려와 함께 행복해졌다.
그간의 고단함과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케이크를 잘라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몸을 씻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아쉬움이 가득 담긴 여섯 개의 까만 눈동자가 텅 빈 케이크 상자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케이크가 그렇게 맛있었어?”
케이크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모습을 보니 행복감은 사라지고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로부터 한동안 선물 사달라는 말을 듣지 못한 터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달라고 때를 쓸 법 한 어린것들이, 오로지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선물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케이크만 한 통 뚝딱 먹어치웠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 큰아이는 중3, 둘째는 초등학교 5학년, 막내는 1학년이었다.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하루는 육아와 가사로 분주하게 채워져 있었고, 종종 고단한 일상에 지칠 때도 있었지만,
세명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늘 우리 부부에게 충분한 보람과 기쁨을 주었다.
나는 세 아이들이 부족함 없이 자라고, 온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각기 다른 나이, 성격, 개성을 갖은 세 아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었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동시에 보살피는 일은 내 삶을 다이나믹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때론 지칠 때도 있었지만, 세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상을 통해 나 또한 많은 것을 배웠다.
아이들이 점차 성장하고 학교에 가게 되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교육을 적절히 제대로 제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공부에 집중하고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유명한 학원을 등록하고 학업적으로 부족한 점이 없는지 관리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성적이 곧 엄마로서의 내 점수였다.
세 아이들을 태우고 영어, 수학, 예체능학원과 야외활동, 전시회, 음악콘서트, 도서관도 열심히 다녔던 나는, 남편의 병세가 심각해지자 더 이상 아이들을 위한 라이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남편의 다리 경직이 시작되며, 나는 아이들 대신 남편을 태우고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혼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학원을 다니다가 그마저도 포기하고 서로를 돌봐야 했다.
미래를 위한 학업 성적 보다 지금 현재 서로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까지 시작되며 세명의 아이들은 집에서 서로를 챙겨야 했다.
연하장애가 심해진 남편은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길 반복하다가 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마비는 이미 팔다리는 물론 가슴까지 진행되어 혼자서는 가래배출도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남편은 회복되어 일반 병동으로 옮겼고, 나는 남편에게 그동안 못본 아이들을 보여주기 위해 집에서 세 아이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혹시나 남편의 상태를 보고 어린 아들이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이에게 미리 언질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별아, 이따 아빠를 만나면, 아빠가 코랑 목에 줄이 달려있고 기계가 많이 연결되어 있을 거야. 다 아빠가 빨리 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니까 놀라지 마"
라고 이야기하며 백미러로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아이는 오랜만에 아빠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한껏 들떠있었다.
"응! 나도 그런 거 다 알아. 영화에서 많이 봤어!"
아이의 씩씩한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코로나 시국이라 병원 출입은 쉽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은 면회가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입원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의 경비 아저씨를 피해 2층 외래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한 명씩 번갈아 남편이 있는 병동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오랜만에 아빠를 본 아이들은 마스크를 쓴 채 서로의 얼굴만 확인할 수 있었고, 감염 걱정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게다가 의료진과 다른 환자들의 눈치가 보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정리하는데, 항상 시끄럽게 떠들던 개구쟁이 막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막내아들을 찾아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이는 조용히 자기 침대와 창문 사이 틈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나는 아이 옆에 가서 괜찮은지 살폈다.
"왜그래? 기분이 이상해? 뭐 먹을것을 좀 줄까?"
처음엔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안 하던 어린 아들은 내가 다가가자 울음을 터트리며 나에게 안겼다.
"나는 아빠가 나아지고 있는 줄 알았어!"
그날 나는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엄마 아빠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본 것은 큰아이였다.
하루는 큰아이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막내가 열이 나는데 해열제를 먹여도 열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다고 문자가 왔다.
나는 타이레놀과 부루펜을 동시에 먹이라고 문자를 보내고 하던일을 빨리 마무리 했다.
"엄마! 타이레놀도, 부루펜도, 다 같이 먹였는데도 열이 더 오르는것 같아. 별이가 너무 이상해!"
큰아이가 울먹이며 전화를 했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갔다.
큰아이 말대로 막내의 열은 39도가 넘어 있었다.
나는 일단 열을 식혀야겠다는 생각에 욕실로 데려가 미지근한 물로 아이를 닥았지만 아이는 몸도 가누지 못하며 헛소리까지 중얼거렸다.
응급실이라도 데려가야겠다 판단하고 아이를 업고 급하게 현관을 나섰다.
"철퍼덕!"
큰아이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을 식히겠다고 아이에게 뿌렸던 물이 현관까지 흥건해져 미끄러웠는데, 급하게 따라오던 큰아이가 그 위에 크게 자빠진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큰아이가 현관 바닥에 엎어져 넘어진 채로 순식간에 양손을 뻗어 동생 신발 한 짝씩을 쥐고 일어나고 있었다. 넘어진 것보다 동생 신발을 챙겨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던 큰아이는, 무릎이 까져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얼굴이 창백해진 상태로 놀라 나를 쫓아왔다.
난 그날의 큰아이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무르팍이 까진 줄도 모르고 동생 신발을 챙겨 쫓아오던 큰아이의 하얀 얼굴과 겁에 질린 사슴같이 꿈뻑이던 커다란 그 까만 눈동자를.
나에게도 코로나가 찾아왔다.
지금까지 겪었던 감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무증상으로 항체가 생긴 아이들에게 뭐라도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겨우 거실로 나왔지만, 어지러움에 다시 소파에 쓰러져 누웠다. 한참을 그렇게 버티고 있는데, 어린 막내가 내 옆에 다가와 마치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했다.
“엄마까지 아프면 우린 끝장이야.”
그 어린 아들의 말이 나를 번쩍 일으켜 세웠다.
엄마가 힘들지 않도록 집안정리를 해 놓으며 나에 대한 사랑을 편지와 카드 글로 적어 주는 둘째의 응원이 내 마음을 녹인다.
엄마의 몫까지 일부 감당해 주는 큰아이 덕분에 직장을 다니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아이들을 챙길 수 있었다.
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좋은 성적 따위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가끔 유독 힘이 드는 날,
퇴근길에 사가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반기며 한번 웃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날 내가 어떤 일을 겪었든 간에 이 아이스크림 한통이면 세 아이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행복이 나를 구해주기 때문이다.
파도가 덮칠 때마다 바다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바로 세 아이들이었다.
어린 딸에게 만두를 먹이시던 아버지에게 묻고 싶다.
'아빠! 제가 아빠를 큰소리로 부르며 충분히 웃어드렸나요?'
내가 하루를 마치고 세 아이들 안을 때 얻는 위안과 안식을 아빠도 얻으셨을까?
어린 딸로부터 밀려드는 기쁨과 세상이 다시 환해지는 느낌을 갖고 다음날 다시 전쟁터같은 직장으로 나가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