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점점 목소리를 잃었다.
출근길, 어린 자식들이 에미 없이 홀로 일어나 배 곪지 않고, 지각도 하지 않고, 무사히 등교하길 바라며 집을 나섰다.
혹시 양치질을 빼먹거나 제대로 옷을 챙겨 입지 못한 막내가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따가운 시선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다가, 걱정은 곧 남편에게 보낼 아침인사 고민으로 이어졌다.
남편은 메이저 병원의 치료 기간 외에는 내가 출퇴근하며 잠시라도 들릴 수 있는 회사 근처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곳에서 요양보호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몸이 굳지 않도록 오전오후 빼곡하게 재활치료를 하고 있었다.
'일어났어? 아침은 먹었고?'
처음엔 남편의 몸상태를 물어보곤 했다.
남편이 다리가 부드러워져서 강직이 좀 덜하다고 하면,
이번에 했던 뭔가가 효과가 있었나 보다 하며 좋아하겠지만,
만약 그날 아침부터 오른팔을 팔걸이에 올릴 수 없어져서 낙담하고 있는데 괜스레 상태를 물어봤다가는 상처만 더 긁게 될 터였다.
남편의 기분과 몸상태 따라 매일 아침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었다.
‘기분은 좀 어때?'
실망하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나의 아침 인사는 남편의 몸상태보다 마음 상태를 묻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잘 쓰던 기계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장으로 제대로 작동을 안 하면,
연결부위들을 청소한 후 다시 전원을 켜보곤 한다.
막연한 마음으로 제대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남편의 재활과 치료가 이어졌다.
해결해 주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고문당하다,
더 이상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기만하고 있었다.
이제 예전으로 회복될 수 없다는 현실을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 묻고, 묵묵히 이번에 받은 치료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몸이 굳지 않게 재활치료를 받았다.
나는, 남편이 자신의 몸이 점점 무너져가는 것은 느끼고 있다는 걸,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늘과 짧아지는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혹여 남편이 다시 의욕을 찾지 않을까 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우리의 세 아이들이 식어가는 남편 마음에 작은 불씨가 되길 바랐다.
“학부모 상담주간이라 선생님들을 만나고 왔는데, 막내 선생님이 아침마다 누나가 씩씩하게 동생을 교실까지 챙기고 간다며 둘째 칭찬을 하더라고. 이따 막내랑 둘째하고 통화 한번 해봐요. 숙제도 한번 물어보고.”
아이들의 존재를 느끼고 아빠로서의 자신을 상기하며 의욕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이미 깊은 우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듯했다.
“내일은 당신만 와”
남편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나빠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했다.
제때 퇴근할 수 있는 날이면 남편이 좋아할 만한 먹을거리를 사들고 병실을 찾았다.
집에는 어린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떡볶이나 피자 등을 나누어 먹으며 그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의 눈빛은 점점 침울하게 흔들려갔다.
몸과 함께 남편의 마음도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몇 년 전, 중2 겨울방학, 외대부고 겨울캠프에 다녀온 큰아이의 눈에는 자신의 미래를 향한 열망이 가득했다.
캠프에서 미국의 명문대가 목표인 친구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며 자신의 꿈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 터였다.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 한 이후, 전교 10등 안에 드는 좋은 성적으로 우리 부부를 기쁘게 했다. 온 가족이 아이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에 잔뜩 부풀어 있던 시기였다.
우리는 아이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이의 실력이나 우리의 서포트로 실현 가능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뒤부터, 아이도 나도 그 계획에 대해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늦은 시간 집에 돌아와 보니 큰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집안일을 처리하고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되어있었다.
후딱 샤워를 하고 나와서 다시 아이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욕실로 갔다.
그때, 거기 욕실 앞 화장대 위에 종이 한 장이 살랑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가벼운 종이 한 장 속에는 아이의 무거운 절망이 앞뒤로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난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급속 도로 퍼지고 있는 아이의 마음속 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줄곧 아이들을 안심시키겠다고,
‘아빠가 아프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풍족하진 않아도 엄마가 너네들 먹이고 가리키고 할 수 있어.‘라는 자위적인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 경제적인 부분을 챙기는데 집중하다 아이의 정서적인 결핍을 살펴보지 못했다.
그제야 우리 가정의 시련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자기가 더 노력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비참해하며 자포자기 한상태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큰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상처는 방치된 채 곪아 터지고 있었다.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아이는 우리의 불행한 상황과 자신의 꿈이 사라진 것을 자기 탓하며 엄마를 실망시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 때문에 엄마의 시간과 돈이 낭비된 것 같아 미안해요. 내가 만약 병신 같은 겁쟁이가 아니라 용기가 있다면 벌써 뛰어내려서 죽어버렸을 거예요. 제가 겪고 있는 것보다 엄마가 훨씬 더 힘들게 지내고 있을 텐데,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미안해요. 엄마는 항상 나에게 많은 사랑과 노력을 쏟아 주셨는데, 나는 그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낭비해 버렸어요."
I'm sorry for being a failure and being a waste of ur money and time.
i would have killed myself already if i wasn't a fucking coward and too afraid to jump i know ur having a worse time than I'm having now.
sorry for being selfish and weak u don't deserve this.
u put so much love and effort and everything in general into me but i keep wasting everything and not trying enough.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엄마대신 동생들을 돌보며 학업을 이어가던 큰아이는 심하게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아이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편지 안에 녹아져 있었다.
나는 아이를 내 목숨보다 사랑하지만,
지금 아이에겐 내가 줄 수 없는, 다른 도움이 필요한 게 분명했다.
나는 다른 가족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구청의 청소년 심리상담센터에 치료신청을 했다.
아이는 어릴 적 예방접종을 맞히러 갈 때처럼 심리치료를 받는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운이 좋았다.
코로나 시국이 행운으로 작용한걸까?
구청의 청소년 심리상담센터가 폐쇄되면서 상담은 모두 가정 방문 상담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선생님은 경험이 풍부한 심리상담선생님이였다.
나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아이에게 선생님의 방문을 알렸고, 선생님은 문자와 전화로 아이가 불안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뒤 방문해주셨다.
"어머니, 이 아이에게는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앞으로 몇 년이 더 필요할 수도 있어요."
선생님은 집에 직접 오셔서 아이와 자연스럽게 친해지기까지 여러 회기를 투자하며 상담이 가능하도록 거리를 두고 천천히 다가와 주셨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자 상담을 절대 안 하겠다던 아이가 선생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이의 트리거는 바로 어머니였네요"
유독 오랜 상담을 하던 첫날, 선생님이 이야기했다.
아이의 충혈된 눈과 붉게 부어오른 눈두덩이, 빨갛게 젖어있는 코와 입술을 보고,
아이가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사춘기 소녀라면 엄마에게 불만도 많고 반항심도 있을 법한데 내 이야기를 하자 아이가 빗장을 풀고 감정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 뒤 아이는 힘든 날이면 선생님에게 직접 추가 상담 신청도 하며 조금씩 마음의 상처를 치료했다.
나도 심리치료선생님과 아이에 대한 부분을 추가적으로 자문하며 아이의 마음을 살폈다.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통 내려놓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동영상을 추천하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압박.
나만 바라보는 남편,
불안한 눈빛의 아이들,
저 중에는 외면하거나 내려놓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이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필요한 대체 방안을 찾아낼 수 없으면 그냥 내가 했.어.야.했.다.
그것이 이끌어 나가기였든 책임지기였든 버티기였든 간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니 그냥 했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은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¹ 중
설움이 복받치는 날이면 출근길 차 안에서 쏟아내고, 화장을 고친 후 직장에서의 전투를 치러냈다.
수위가 한계에 다달았다가도 그렇게 쏟아 내고 나면 또 채워질 공간이 생겼다.
그즈음 나는 업무압박이 조금 더 높은 영업조직이 있는 계열사로 사간이동² 하게 되었다.
더 나은 급여조건과 아이들 대학 등록금 보조라는 거절할 수 없는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번아웃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해서 늘어질 새가 없었다.
지쳐 가라앉는 것 같으면 자낙스³를 한알 털어 넣고 스트레칭을 했다.
'이게 뭐 대수야. 지금 까지 내가 견뎌온 나날들을 생각해 봐!'
스스로 다짐하며 집에 들어가는 길에 오늘은 31가지 맛 중 어떤 맛 3개를 골라 가면 애들이 좋아할지 상상했다.
아무 일 없이 평온히 지내는 사람은 작은 사건 하나에도 무너 질 수 있고,
큰 사건을 여러 개 끌고 가야 하는 사람은 또 다른 큰 사건도 그저 담담히 대응할 뿐이다.
지금 이 시련은 온전히 내 것이며 내가 극복해야하는 수 많은 것중 하나일 뿐이다.
1. 숫타니파타
불교의 초기 경전. 저 글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귀인데 '무소의 뿔'경에 나오는 글이라고 한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한동안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저장해 놓고 다닐 정도로 좋아하던 글귀이다.
2. 사간이동
지주 회사가 같은 계열사 간에 이직 처리 시 사용되는 용어이다. 입사 연도와 사번은 그대로 유지된 체 이직하게 된다. 같은 계열사여도 복지와 처우는 조금씩 다르다.
3. 자낙스(화이자 현재 국내에서는 다른 제약회사로 바뀜)
항불안제. Benzodiazepine계열의 약으로 중추신경의 벤조디아제핀 수용체와 결합하여 GABA라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을 강화시킨다.진정효과가 있어 흥분과 불안을 가라앉혀준다. 반감기가 짧아 단기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