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하던 어느 날, 상사가 나를 불렀다. 한참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차기 연도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인사이동과 업무변화가 있을 것이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남편의 병세와 아이들, 그리고 끊이지 않는 소송까지 시달리는 지금, 새로운 업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다.
시기적으로 이제 온라인 사업의 비중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경영진의 판단이 있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본부장님, 올해 수익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시장의 흐름을 보면 온라인 사업은 계속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애들 아빠도 요즘 상황이 안 좋아서…”
그 순간, 말끝이 흐려졌다.
'앗차'
정신없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다니,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멘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과하게 반응해야 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나를 내쫓는 것도 아닌데, 불안감이 높아져 과잉 반응을 한 게 분명했다.
‘항불안제를 좀 먹어야겠다.’
인터넷으로 근처 정신과를 찾아 점심시간에 진료 예약을 했다.
사무실에서 10분 거리의 병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혹시라도 회사 사람들에게 들킬까 두리번거렸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접수를 하며, 목에 걸린 회사 출입증을 셔츠 안으로 숨겼다.
‘내 상황을 어떻게 요약해서 말하지? 의사 앞에서 신세 한탄할 시간이 없는데.’
난 의사에게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30대로 보이는 남자선생님은 연신 한숨을 쉬며 "아이고... 힘드시겠어요"라고 말했다.
일주일 약을 먹어보고 다시 보자고 했다.
난 2주 뒤에 오겠다고 2주 치를 달라고 있다.
내년 사업계획 보고 자료를 만드는데 데이터의 숫자가 맞지 않았다.
SAP¹의 데이터를 넘겨받아 가공하고 내년도 계획을 수립해서 다른 팀에 넘겨야 하는데 Raw 데이터가 담당자마다 달랐다. 숫자를 맞추는 작업은 새벽 4시 반쯤에 끝났다. 집에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여직원 휴게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지만, 몸은 무겁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다른 팀이 출근하는데로 완성된 자료를 넘겨야 하는데, 원본 SAP 데이터를 뽑아준 담당자가 어쩔 줄 모르며 다급하게 찾아왔다.
"데이터를 잘 못 뽑아 드린 것 같아요. 다시 뽑아드릴게요"
밤새 했던 작업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커피 한잔을 뽑아 한강을 내려다보는데 전화가 한통 왔다.
"팀장님~ 내년에 이쪽으로 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예요?"
친한 지점 팀장이었다.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며 숨이 막혔다.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저 한강물 속으로 투신하고 있었다.
"모르겠어. 나처럼 나이 든 여자가 해보지도 않은 세일즈를 어떻게 하겠어. 일단 나 내년도 목표 잡느라고 집에도 못 들어가서 너무 피곤해. 다음에 통화합시다"
서둘러 전화를 끊었지만, 그게 피곤 때문만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목이 메이고 눈물이 쏟아졌다.
곧바로 정신의학과로 뛰어갔다.
“저 지금 죽을 것 같아요. 남편도 위독한것 같고, 이혼 소송이랑 집 경매 결과도 모르겠고, 인사이동도 있다고 해요. 내년이면 여의도 사무실에서 없을지도 몰라요.”
의사 앞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의사는 눈을 크게 뜨고 흔들리는 내 눈빛을 붙잡았다.
"일단 집에 들어가셔서 잠을 좀 주무세요. 그리고 이번 위기만 잘 극복하세요. 이번 위기를 넘기면 또 이겨낼 수 있어요."
절대 꺼지지말고 버티라고, 버티면 또 살아진다고 말했다.
“약을 넉넉히 주세요. 저 다시 못 올지도 몰라요.”
심각한 염증에는 강력한 항생제만이 유일한 치료법일 때가 있다.
왜 업무변동이 있었는지, 본부장님의 말처럼 회사의 전략이 바뀐 탓인지, 혹은 내가 뭔가 잘못했는지, 아니면 온라인 사업의 다른 적임자가 있는지, 그런 것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남편이 왜 병에 걸렸는지, 그토록 열심히 병원을 다니며 수많은 의사들을 만났음에도 왜 그를 지켜낼 수 없었는지. 왜 나는 큰아이의 어려움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왜 목사라는 인간은 아픈 아들을 볼모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왜 시모는 세 명의 어린 손주들은 안중에도 없고 노후만을 걱정하는 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고, 나는 무슨 실수를 했는지 그런 시시비비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유와 의미를 찾지만 문제는 해결이 필요하다.
독화살을 맞으면, 그 화살을 먼저 뽑아야한다.²
누가, 왜 쐈는지, 내가 왜 맞았는지 따질 여유가 없다.
아이들에게서 메세지가 온다.
'엄마 오늘도 못와?'
'엄마 우리 우유 없어'
'엄마 언제와?'
독이 몸속에 퍼지기 전에, 나는 살아내야한다.
병원 문을 나서며, 처방받은 웰부트린³과 자낙스⁴ 한알씩을 급하게 씹어 삼켰다.
이제 에미도 없이 이틀을 웅크리고 있었을 아이들에게 가야한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 파도가 밀려올 때, 우리는 그저 휩쓸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뿐입니다. 내가 간신히 버텨낸 방법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빛이 되기를, 그것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닐지 몰라도, 어둠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쉼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SAP
기업의 자원 관리 및 데이터 처리,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독일의 소프트웨어 솔루션
2. 독화살의 비유
중아함경, 법화경등의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추상적인 질문들에 매달리지 말고,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실용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다.
3. 웰부트린
부프로피온 성분의 항우울제로 노르아드레날린과 도파민 증가를 통해 작용한다. 내가 처방받은것은 서서히 흡수되는 서방정이였는데, 서방정은 씹어먹으면 안된다.
4. 자낙스
항불안제. Benzodiazepine계열의 약으로 중추신경의 벤조디아제핀 수용체와 결합하여 GABA라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을 강화시킨다.진정효과가 있어 흥분과 불안을 가라앉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