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 예찬

by SEEYOUHERE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온다. 딴짓하기 좋은 계절이다.

옷차림이 가벼워지니 발걸음도 따라 붕붕-. 방 안까지 스미는 볕이 외출 준비에 흥을 더한다. 가만히 누워 창을 넘나드는 봄내음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배시시- 나오긴 하지만, 잡힌 약속 없이도 괜스레 들뜨고 신나는 마음을 모른 체할 순 없을 테다. 어디로든 나가고 싶고 뭐든 해보고 싶은 봄. 나른히 널브러져 지나온 계절을 복기해 본다.


‘참 다사다난한 겨울이었지. 고생했다, 나 자신’

토닥이며 새로 장만한 선풍기를 켜본다. 괜히 바닥도 청소포로 한 번 더 닦아보고 옷장에 꼭꼭 숨어있던 안 입는 옷들을 다 들춰내본다. 여행 브이로그를 틀어놓고 조금은 허황된 휴가 계획도 세워본다. 사고픈 옷들은 여전히 많은데 살이 조금 쪘다. 살을 먼저 빼야 옷을 살 수 있다고 내게 으름장을 놓는다. 날도 풀렸으니 밖에서 러닝이라도 자주 하라고, 그래야 새 옷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거라고. 새 가구를 들이는 일도 집을 비워내야만 가능한 것이 우리 집의 룰이다. 물건들을 좋아하지만 물건들 사이에 끼여 살고 싶지 않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꿀템’들이야 많지만 없어도 없는 대로 어리숙한 맛이 있다. 덕덕거림 없이 매끄럽기만 한 생활 방식은 보기엔 능숙해 보일지 몰라도 왠지 공허한 느낌이랄까. 기계에, AI에, 고성능을 자랑하는 머시기머시기에 자꾸만 생활 노동을 위탁하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할 일을 다 내어주고 나면 나는 뭐가 되나?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나? 여유가 생겨 마냥 좋을 것 같아도 그렇게 얻어진 한가한 시간들은 결국 시시하게 쓰이고 만다. 누워서 릴스도 보고 또 돈 쓸 궁리를 해대겠지. 그냥저냥 사는 사람들처럼.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끔은 제대로 된 고성능의 머시기머시기를 큰돈을 들여 산다. 이왕 사는 거 좋은 걸로 제대로. 스마트폰, 노트북, 청소기, 커피포트, 오븐, 드라이기 같은 것들. 매일 쓰고 손에 닿는 것들. 제법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편리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또 궁리해 탄생한 것들 말이다. 한 사람을 만날 땐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함께 오는 것이라고 하던가.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다. 그에 담긴 기술과 고민과 실패를 극복한 모든 역사가 하나의 결괏값으로 오는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일. 다이슨 같은 건 쓸 때마다 놀랍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고 싶지 않은 것들. 쓸 때마다 놀라고 싶은 물건들.


꼭 전자기기가 아니어도 사용자를 생각하며 잘 디자인된 물건들을 사서 쓰다 보면 별 거 아닌 디테일에서도 감동하는 일이 종종 있다. 돈이 아깝지 않은 소비는 그런 것 같다. 일상에서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소비. 겨우 이거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노고와, 겨우 이거 하나를 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번 나의 노고를 겹쳐 놓고 뭉클해지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고 있으면 물건들도 마냥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한 손님처럼 대해야 할 것만 같다. 나와 함께 지내는 게 불편하진 않은지 잘 살펴드려야 할 것만 같다. 나는 손재주가 없어 엄두도 못 내지만, 이것저것 잘 고쳐 쓰며 사는 사람들, 전자 기기에 탑재된 기능들을 알차게 이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 나는 뭐가 잘 안 되면 껐다 켜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데. 귀한 손님들이 제대로 실력발휘 할 수 있게 설명서라도 꼼꼼히 읽으면 좋으련만, 언제 갖다 버렸는지 필요할 땐 보이지 않는다. 모쪼록 고장 나지 않고 망가지지 않고 곁에서 작동하는 것만으로 값을 다하는 고마운 나의 반려물건들. 예쁘기까지 하면 또 얼마나 좋은지.


품을 들여 집을 가꾸고 몸을 가꾸고 하루를 가꾸고서도, 나랑 친한 사물들과 충분히 어울려 지내고서도 여유가 날 때에야 사람을 만난다. 웬만하면 그러려고 노력한다. 인간관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좀 더 주체적으로, 내 일상을 지키면서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 하지만 어떨 땐 다 제쳐두고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나의 도피처들. 나를 나에게서 꺼내주는, 하이엔드의 전자기기만큼이나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당신들.


당신은 타고나기를 시야가 넓은 사람. 딴짓의 대가大家. 한 점을 응시하다가도 당신의 주의는 점의 테두리로, 배경으로, 점과 당신 사이 공간으로, 점과 당신 밖의 세계로 뻗어 나간다. 당신에게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깝다. 당신은 좀처럼 그만둘 줄 모르는 워커홀릭. 끊임없이 이것 ‘아닌 것’, 이것 ‘밖의 것’, 이것과 ‘다른 것’을 들춰낸다. 당신은 당최 이것 하나에만 만족할 줄을 모른다. 이것 하나만 하며 살기에, 인생은 너무 길고 당신은 너무 의욕 넘친다. ( '이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리라)


산발적인 관심사가, 부지런한 한눈팔기가 때때로 당신을 지치게 할 테다. 사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는 건,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중에서 우선순위를 세우고 하나를 고르는 결단력이다. 그런 결정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심심하지만 동시에 피곤하기도 한 당신은 선택의 순간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곧잘 길을 잃기도 한다. 당신이 가진 집중력이란 것은 작은 움직임에도 이는 먼지처럼, 출렁이는 물결처럼 걷잡을 수 없는 종류의 것. 하지만 산만함은 한편으론 대단한 재능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저 먹는 게 좋아서, 점심을 먹으면서 동시에 저녁 메뉴를 생각하는 것과 같이, 순수한 열정으로 가동되는 산만함.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아서 하는 일들은 언제나 일상에 강렬한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그렇게 각종 다양한 것들에 발을 걸쳐놓으니 우왕좌왕하기도 하지만 이것저것 아는 것도 아는 사람도 많아 좋은 점도 있다. 어쩌면 당신의 산만함은 욕심이나 허영심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다 갖고 싶고 다 해보고 싶은 욕망. 그렇지만 욕망들에 짓눌리지 않고 지치지 않고 잘 끌어안고 사는 한, 마음껏 욕심을 부려봐도 좋지 않나. 겸손은 언제나 환영받는 미덕이지만 자기에게까지 얌전을 뺄 필요 없다.


늘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일 생각을 하는 당신과 나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알고리즘을 교란시킨다. 익숙하고 고루한 것들을 밀어내고 새로고침 한다. 오래 묵은 고민들까지도 환기되는 기분. 매일 쓰는 단어, 흔한 표현인데도 당신 입에서 나오는 건 전부 새롭고 달리 들리는 건 왜일까. 봄바람처럼 설레고, 막 돋아난 새싹처럼 싱싱한 생각들. 계획들. 행동들. 어쩌다 시작된, 다소 허황된 생각일지라도 어떤 결실이든 맺을 수 있길 서로를 독려하는 우리. 그런 당신과 노닥거릴 수 있다면 여든이 돼도 청춘일 거다. 안티에이징도 이런 안티에이징이 없다.


당신은 내게 묻는다. 매주 쓰는 글의 소재와 영감은 어디서 찾느냐고. 그럼 난 말한다. 그런 건 도처에 널렸다고. 난 그저 쉽게 실증 내는 탓에 자주 한눈을 팔고 딴짓을 할 뿐이라고. 그럼 보인다. 보려고 하지 않아도 드러나고, 드러난 것들은 서로 연결된다. 그 과정이 매번 매끄러운 것은 아니나 제법 즐길만하다. 대신 새로운 것에 관심의 스위치를 켤 땐, 그 외의 것들은 꼭 off로 해두려고 한다. 새 옷을 사기 위해서는 안 입는 옷을 버려야 하는 규칙처럼. 매주 한 편의 글을 써내는 기쁨을 위해 토요일 밤의 유흥은 포기하는 것이다.


다 얘기하고 보니 역시 인생은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딴짓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틈틈이 한눈을 팔되 초점은 제대로 맞추기. 삶의 미학은 걷어내는 기술로 정합된다. 봄기운에 들뜨는 마음에 앞서 온 집안을 뒤집는 대청소를 제안해 본다. 노트북 파일 정리도 좋고. 뭐가 됐든 비우고 나면 예기치 않던 변화가 자연스레 찾아들 테니. 살랑살랑- 하는 모양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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