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가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서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뱁새의 평안도 사투리
**마가리- 오막살이의 평안도 사투리
얼마 전, 11월 눈으로는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많은 눈이 내려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요. 제가 사는 집이 나지막한 골짜기 위에 있어서 평소에도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곳인데, 이렇게 눈이 내려 쌓이니 산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세상과는 단절된 듯한 적막함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것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눈입니다. 우선 ‘나타샤’라는 이름은 슬라브어권의 여성 이름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해서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며, 그래서 주로 12월에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붙여 준다고 합니다.
시는 하얗게 눈 덮인 설경과 흰 당나귀와 눈 많이 내리는 북쪽 어디선가 눈 내리는 날 태어났을 것 같은 나타샤, 이렇게 온통 흰색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다분히 환상적 이미저리임을 먼저 이해하고 이 시를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푹푹 내리는 눈, 이국적 이름의 나타샤, 그리고 실재는 존재하기 어려운 흰 당나귀 ( 사실 흰 당나귀는 없으니까요.). 이런 좀 흔치 않은 등장인물과 상황을 설정한 시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어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이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쓸쓸히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눈이 이렇게 푹푹 내리는 이유가 가난한 그가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해서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푹푹 내리는 눈이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사랑을 이 눈이 서로를 격리시키는, 가까이할 수 없게 하는, 그런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시의 전개는 현실과 상상이 서로 교차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나타샤와 눈이 푹푹 쌓이는 밤에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들어가자고 합니다. 그것도 ‘깊은’ 산골에 아무도 없는 ‘오막살이’에서 살자고 합니다. 이 연의 내용도 바로 그들 두 사람의 사랑이 결코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 그러므로 세상과 단절된 곳으로 숨어 버리자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계속 나타샤를 생각하고, 그녀가 ‘고조곤히(조용히)’ 그에게로 와서 이야기하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라고 선언하듯 말합니다. 여기서 이 말은 누가하고 있나요? ‘나’인가요, ‘나타샤’인가요. 갑자기 이런 질문에 조금 멈칫하셨지요? 기존의 평론 중에 이 대목의 해석을 하나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시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은 부분은 3 연이다.(중략) 어느새 화자의 내면에 나타샤가 찾아와서 무어라고 고조곤히 이야기한다. 그 속삭임의 내용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라는 것인데 이것이 나타샤의 속삭임임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을 화자가 하지 않고 나타샤가 한다는데 이 대목의 중요성이 있다. 그것은 나탸사가 산골로 가자는 나의 요청을 수락하는 것이며, (중략) 이것은 내가 나타샤를 사랑할 뿐 아니라 나타샤도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1)
이렇게 이 말을 한 사람이 ‘나’가 아닌 ‘나타샤’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일견, ‘나타샤가 이야기한다’에 뒤이어서 이 말이 나오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산골로 가기를 제의한 사람은 ‘나’이며 그러므로 산골로 가자고 하는 이유를 지금 나타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대목이라고 저에게는 들립니다. 그리고 이 말의 어조(語調)가 여성의 말로 들리시나요? 사랑하는 여인에게 세상의 어떤 비난이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신과 같이 살아가겠다는 남자의 굳센 의지를 선언하듯이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 말을 ‘나타샤가 나의 요청을 수락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마지막 연으로 가 봅니다. 눈은 계속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그리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라고 맺고 있습니다. 여기서 ‘응앙 응앙’은 일반적으로 아기 울음소리로 들리기 때문에 어떤 평론가는 이 연을 “‘응앙응앙’이라는 의성어는 당나귀보다는 아기가 낼 법한 소리이다. 남녀가 세상을 등지고 산골로 간 뒤에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라면 이것은 축복의 의미를 띠면서(중략) 뒤에 일어날 사건을 의성어를 통해 당겨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2)고 아주 흐뭇하고 희망적인 해석을 끌어냅니다.
그러나 지금 화자가 나타샤와 함께 있는 것을 상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지금 두 사람이 벌써 산골로 들어간 것으로 상정하는 것은 좀 성급한 생각 아닌가요. 왜냐하면 ‘나타샤’가 말했건 ‘내’가 말했건,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미래형의 말로 보아 두 사람이 지금 산골에 있는 것을 상상하고 쓴 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화자는 지금 나타샤와 같이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감을 당나귀를 빌어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산골로 갈 때 타고 가자고 한 ‘흰 당나귀’는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고 ‘어데서’ 우는지 잘 모르고 있으니까요.
여기 ‘응앙응앙’ 운다는 표현도 미래에 태어날 아기의 울음소리를 ‘당겨 제시한’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추론이라고 생각됩니다. 당나귀 울음소리가 소나 말의 그것과는 달리 아주 독특해서 멀리서 들으면 꼭 아기 울음 같은 소리를 냅니다.
여기서 그러면 시인에게 ‘나타샤’는 누구일까요. 시적 상상의 여인인가, 아니면 구체적으로 실제 인물을 상정한 시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사람은 당시 기생 신분으로, 백석이 ‘자야’라고 불렀던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백석과 함흥에서 처음 만났고 다시 서울에서 재회한 후 얼마간 같이 지낸 사이입니다. ‘자야’는 두 사람이 남북으로 헤어진 후 그와의 연애담을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써서 정식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진술로는, 당시 함경도 함흥의 한 학교에서 교사로 있어 서로 떨어져 지내던 백석이 어느 날 불쑥 서울에 나타나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새벽에 떠나면서 봉투를 하나 남기고 갔다고 합니다. 그 봉투 속에는 이 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은 단 하룻밤 이마를 서로 마주 조아리다가 학교의 출근 때문에 다음날 번개같이 함흥 천리 길로 되돌아갔다. 가면서도 한마디 남기는 말도 없이 총총히 당신은 봉투 한 장을 떨어뜨리고 뒤를 돌아다보고 또 한참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곤 하였다. 누런 미농지 봉투를 뜯어보니 당신이 친필로 쓰신 한 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단숨에 찬찬히 읽고 나니 몸과 마음이 야릇한 감격에 오싹 자지러졌다.”(3)
이렇게 이 ‘자야’라는 여성은 그녀가 이 시를 직접 받은 전후 상황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백석이 함흥에서 다시 서울로 와서 모 신문사에 다닐 때 그와 1년여 동거한 사실은 분명하고, 그리고 백석이 만주로 떠날 때 ‘자야’에게 같이 갈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때가 1940년, 해방 5년 전이군요. 그리고 남북이 갈라졌으니 영원히 그 사랑은 이룰 수가 없는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이 시는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한 인테리 청년(백석은 일본의 대학에서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사의 편집 기자로 신문에 글도 쓰는 인테리였습니다.) 과 기생이라는 신분의 여인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 그 배경을 생각할 때, 처음 제기한 시의 등장인물과 환상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 시의 표현과 구절의 상징의미가 더욱 절절하게 우리들 마음속에 와닿을 수 있게 됩니다.
그 후 한국의 손꼽히는 요정으로 크게 성공한 ‘나타샤, 자야’는 나중에 그 땅과 재산을 법정 스님을 통해 절에 시주하여 지금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 길상사 절에는 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지금도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1. 이숭원. 백석을 만나다. 태학사 2008. 319쪽
2. 김종훈. 정밀한 시읽기. 서정시학 2016. 145쪽
3. 김자야. 내사랑 백석. ㈜문학동네.1995.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