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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6

by kacy

선운사 洞口

미당 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우리나라 동백꽃 명소 중에는 전라북도 고창의 선운사 동백꽃도 유명합니다. 사찰 경내에 있는 5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고즈넉한 사찰과 어울려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 시의 제목이 왜 ‘선운사 동구(洞口)’인가요? ‘선운사 동백꽃’이라야 시의 내용과 어울릴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 시를 잘 이해하려면 왜 제목이 ‘선운사 동구’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때는 1942년, 시인은 그의 고향인 고창에서 부친이 돌아가신 후 집안 정리를 대충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늦가을의 가느다란 이슬비 속을 우산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선운사 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점심시간도 좀 지나고 출출한 차에 그는 길옆의 조그만 주막을 찾아 들어가게 됩니다. 술이 있느냐고 물으니 아직 개봉도 안 한 꽃술이 한독 그득하다고 해, 그는 그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몇 잔 술을 마셔 좀 거나해지자 주모인 안주인에게 미안하지만 육자배기나 부를 줄 알면 조금만 들려 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하다가 나중에 사 그걸 나직이 불러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때의 소리를 한참 후에도 기억하고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것은 한때의 우리나라 여자 국창이었던 이화중선의 소리 비슷하게 짙은 애수를 띠는 듯하기도 하고 또 김남수의 소리의 그 달빛의 투명을 아울러 가진 것 같기도 했다.”(1) 물론 취중에 들었으니 좀 더 그러하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이렇게 시인은 ‘무슨 전생의 애인이나 만난 것 같은 느낌 속에 멍청히 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여인에 대해서도 ‘이조 왕궁이나 어디 그런 데다 옮겨 놓으면 좋은 후궁감도 넉넉히 됨직한 그런 다스려진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나중에 술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그 꽃술 한 단지를 거의 다 비우고서야 서울로 오는 버스를 탔다고 합니다. 바로 이 버스 정류장의 이름이 ‘선운사 동구’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로 그는 고향의 후배들이 그를 선운사에 한번 초대해 주어서 이 여인도 다시 한번 볼 겸 스무몇 해 만에 찾아가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주막은 어느 하늘로 날아갔는지 온데간데없고, 그 집이 있던 빈터엔 실파만 자욱이 자라고 있었다’(2)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더욱 기막힌 사연도 듣게 됩니다. 육이오 전쟁 당시 공산당 빨치산들이 내려와 그 집은 불태워 버리고 여인은 그들 손에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렇게 한참 세월이 지난 뒤에 그의 심중에 남아있던 아련한 추억은 견딜 수 없는 삶의 덧없음과 슬픔이 되어 되살아났을 겁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의 뇌리에 들리는 듯한 육자배기 가락에서 동백꽃의 자태를 보았을까요. 그것은 지금 핀 동백이 아니라 작년에 핀 꽃, 아니 20여 년 전에 피었던 그 꽃, 아니 그것도 아닌 그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때의 빈 집터와 거기 돋은 실파와 그 근처의 동백꽃을 보는 시인의 눈에는 그 여인이 그런 것들에도 노래 부르며 들어 있을 것으로 느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인은 그녀의 육자배기 가락이 다시 들리는 듯한 심정을 이렇게 동백꽃과 엮어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인의 시는 삶의 한순간을 그의 마음속에 두고 곰 삭이다가 다른 모습의 시의 언어로 창조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이 시의 막걸릿집 여자의 모델은 바로 위의 여인입니다.

시인은 이 시를 1968년에 발간한 그의 5번째 시집인 ‘동천’에 발표합니다. 그러니까 선운사 동구에서 있었던 그 일 이후 20여 년이 지나고서야 선운사 동백꽃과 어울려 하나의 시가 만들어졌으니 참 꽤나 세월이 흐른 뒤의 작품입니다.

이 시를 해석하는 평론가들은 무슨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느니 하는 수험생 같은 소리만 하지만, 그런 분석은 잠시 접어두고, 이 시가 주고 있는 것은 우리 삶의 무상함, 세월의 덧없음을 넘어서서 꽃잎 하나 풀포기 하나에서도 우리의 아련한 추억 속의 무엇을 기억해 내고 느낄 수 있다는 그런 의미의 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의 제목이 왜 ‘선운사 동구’가 될 수밖에 없는지 이제 이해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고창 선운사 입구에는 여인도 가고 시인도 가고, 다만 이 시가 새겨진 시비(詩碑)만 하나 남아있을 뿐입니다.


1. 서정주. 천지유정. ㈜은행나무 2021. 113쪽

2. 위의 책.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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