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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의 애송시 감상노트13

by kacy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0여 년 전 좀 큰 수술을 하고 퇴원해서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 주변이나 바로 옆에 있는 탄천(경기도 용인 성남을 거처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 변을 조금씩 걷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이때가 4월 초였는데 오랫동안 자주 걸어 다니던 길인데도 천천히 걸으니 전에는 전혀 보지 못하던 조그만 풀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너무 작아서 가까이 다가가 무릎 구부리고 쪼그려 앉아 가만히 쳐다보아야 잘 보입니다. 그 색깔과 모양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그 이름을 알아가는 재미가 또 얼마나 좋았던지. 이 세상의 것이되 내가 몰랐던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는 그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고. 여기서 ‘그’는 무엇인가요. 꽃인가요, 아니면 사람인가요. 세상의 어떤 하잖게 생긴 것이라도 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주변에 계절에 맞추어 돋아나는 꽃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이름을 모를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관심도 없는 꽃 또는 우리 주변의 사람을 포함한 모든 물체는 우리에겐 거저 하나의 의미 없는 사물, 몸짓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알아서 이름을 부른다면 내가 진정 안다고 할 수 있는 대상이며, 철학가들이 좋아하는 식으로 말하면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시 속 화자는 이제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하고 요청합니다. 우리의 이름 외에 호(號)를 가지는 경우. 스스로 짓는 경우도 있지만, 스승 친구 등 남이 그 사람의 취미나 성격 능력 등을 반영하여지어 줄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나에게 맞는 이름을 불러 달라는 의미는 사실 굳이 말하자면 철학적 생각을 조금은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알맞은 이름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실존’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게 ‘나에게 맞는 이름을 불러다오’라는 말은 나를 지금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관계를 갖기를 바라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막상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요청을 한다면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생각과 그의 태도, 그가 좋아하는 것 등등 그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는 나의 꽃이 되는 것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풀꽃의 이름을 찾아보다가 또 많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민들레, 제비꽃, 쑥부쟁이, 씀바귀 등 귀에 익숙하고 예쁜 이름도 많지만 좀 이상한 이름도 많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 ‘며느리밑씻개’라는 풀꽃이 있습니다. 이 풀은 날카로운 가시가 그것도 거꾸로 줄기에 다닥다닥 나 있습니다. 농촌에서는 아주 흔한 풀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미운 며느리가 이걸로 어디를 닦는다고 생각하면서 그 시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인가요? 참 해도 해도 너무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꽃도 그 분홍색 꽃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는 할미꽃이 있습니다. 할미꽃은 이른 봄에 양지바른 곳에 피는 참 예쁜 꽃입니다. 키도 작고 거기다 고개까지 숙이고 있으니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꽃 색깔도 파스텔색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가만히 꽃을 손에 받혀서 보면 꽃과 가지가 온통 솜털에 쌓여 있어서 할머니는커녕 그 반대로 아직 솜털도 못 벗은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시골 처녀를 연상하게 되는 예쁜 꽃입니다. 꽃이 지고 나면 씨가 매달린 하얀 머리카락 같은 것이 생겨서 할미꽃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지만, 도무지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이라고 하기엔 너무 다른 이미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시로 돌아가서 마지막 연은,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에게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전부 ‘꽃’이 되면 좋겠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다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래도 하나의 ‘눈짓’이 되자고 합니다. ‘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몸짓’이 ‘눈짓’으로 바뀌기 위해서 우리는 최소한 상대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기만 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여기에 만약 사랑하는 마음까지 담는다면 그는 이제 나의 ‘꽃’이 될 것입니다.


시인의 이 시는 그의 초기작품(1952년 작)입니다. 그의 시의 제목에는 꽃이 들어가는 작품이 많은 편입니다. ‘꽃 1’, ‘꽃 2’, ‘꽃의 소묘’, ‘꽃을 위한 서시’, ‘두 개의 꽃잎’ 등등입니다. 그는 또 ‘꽃과 여우’라는 장편 소설까지 썼습니다.

김춘수 시인은 초기에는 이 ‘꽃’과 같은 어떤 의미를 담은 시를 썼지만, 이후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길인 ‘무의미의 시’ 말하자면 시에서 관념 즉 철학을 배제한 시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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