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12
무서운 시계
정지용
오빠가 가시고 난 방안에
숯불이 박꽃처럼 새워간다.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어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
망토자락을 여미며 여미며
검은 유리만 내어다 보시겠지!
오빠가 가시고 나신 방안에
시계소리 서마서마 무서워
서정시의 제목으로 ‘무서운 시계’는 좀 특이한 제목입니다. 제목만 보면 어쩐지 무서운 내용일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먼저 이 시에서 쓰고 있는 옛말 시어를 지금 쓰는 말로 고쳐 볼까요. ‘새워간다’는 ‘사위어 간다’, 풀이하면 ‘불이 다 타서 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산모루’는 산모퉁이, ‘이밤사’는 ‘이 밤에는’ 정도로요. ‘이 밤사’라는 표현은 조지훈의 시 ‘승무’에도 나옵니다.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제 시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숯불이 박꽃처럼 새워간다.’에서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숯불이 다 사그라지면 검은 숯은 이제 하얀 재가 됩니다. 이 하얗게 변한 재의 모습에서 박꽃을 연상합니다. 박꽃을 실제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달 밝은 밤에 초가지붕 위에 활짝 핀 박꽃을. 박꽃은 특이하게 밤에 피는 꽃이니까요. 박꽃은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크고, 그 흰색은 정말 순수백색으로 어떤 경외감 내지는 무서운 느낌까지 듭니다.
이렇게 시의 화자는 오빠가 떠나고 텅 빈 방에서, 숯불은 식어, 춥고 쓸쓸하고 외롭고 슬픕니다. 그 속에서 느끼는 화자의 감정이 이 박꽃의 희고 흰 이미지를 통해서 독자에게 더 절실하게 전달될 것입니다.
산모퉁이 돌아가는 오빠가 탄 기차 소리는 쉰 목소리처럼 멀리서 들립니다. 오늘 밤은 아니래도 내일쯤 비가 오시려나.
제가 사는 집은 영동고속도로에서 몇 킬로 떨어져 있습니다. 평소에는 고속도로에 차가 달리는 소리가 안 들리다가, 구름이 낮게 깔리고 비가 올 듯하면 쌩쌩 달리는 차 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리곤 합니다.
추운 겨울이라 기차를 탄 오빠는 추워서 망토를 여미며 또 여미며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리라고 상상합니다.
소녀는 추운 겨울 화롯불도 꺼지고 어둑어둑 밤은 다가오고 비가 올 듯 음산하기도 한, 오빠마저 떠난 어두운 방에서 째깍째깍 울리는 시계 소리만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평소에는 못 느끼던 어떤 소리가 조용히 그것도 밤중에 혼자 있을 때 새롭게 들려오는 경험을 하셨겠지요. 그리고 그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톡!, 톡!, 톡!’ ‘재각!, 재각!, 재각!’ 이렇게 울리면 그 리듬에 나도 모르게 정신이 빨려 들어가서 섬뜩한 느낌이 들지 않으셨나요.
‘시계소리 서마서마 무서워’ 이렇게 화자인 소녀는 오빠가 있을 때는 잘 못 느끼던 그 시계소리가 새삼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잘 공감이 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서마서마’는 어떤 모습을 표현한 것일까요? 이제 이 시의 시어 중에 최대의 난제에 부닥쳤습니다.
여기서 먼저 평론가들의 해석을 한번 보겠습니다.
한 평론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서마서마’가 설마 시계소리의 의성음은 아닐 것이다. 어린 소녀의 얼마쯤 두렵고 외로운 심정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낯설거나 어색한 것과 연관된 ‘서먹서먹하다’란 말을 유추적으로 변형시킨 것일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평소 심상하게 들리든 시계소리 같은 것도 갑자기 낯설게 들리는 것이다.”(1)
그리나 또 다른 평론가는 앞의 해석을 반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시계소리의 의성어도 아니고 ‘서먹서먹하다’에서 유추적인 변형을 일으킨 말도 아니다.(중략) 이 말은 ‘어떤 일이 걱정이 돼서 몹시 마음 졸이다.’의 뜻을 지닌다. 이는 조마조마하다는 말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2)
두 평론가는 ‘서마서마’라는 표현이 어린 소녀의 외롭고 두렵고 또 가슴 졸이는 심정의 표현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앞의 평자는 시계소리가 ‘낯설어서’ 무섭다고 풀이하고, 뒤의 평자는 시계소리와는 무관하게 오빠의 떠남을 걱정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의 표현으로 봅니다.
정지용은 그의 시에서 이런 의성어, 의태어를 즐겨 씁니다. 그의 시 ‘폭포’를 한번 보실까요.
하인리히 하이네적부터
동그란 오오 나의 태양도
겨우 끼리끼리 발굽치를
조롱조롱 한나잘 따라왔다.
산간에 폭포수는 암만해도 무서워서
기염기염 기며 내린다.
‘폭포’(부분)
자, 그럼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서마서마’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말은 주어인 ‘시계소리’와 형용사 ‘무서워’의 사이에 나옵니다. 그러니 이 ‘서마서마’는 부사어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무서워’를 꾸미는 말(수식어)입니다.
‘무서워’를 꾸밀 수 있는 부사어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너무너무 무서워
오싹오싹 무서워
섬뜩섬뜩 무서워
선득선득 무서워
서마서마 무서워
이렇게 ‘서마서마’는 무서움의 정도를 표현하는 그런 말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위의 평론가의 해석인 ‘서먹서먹하다’는 의미의 해석은, ‘시계소리 서먹서먹 무서워’, 또는 ‘시계소리가 서먹서먹해서 무서워’가 되는데 좀 어색하지 않으신가요.
두 번째 평론가의 해석인 ‘조마조마하다’는 ‘시계소리 (오빠가 떠난 것이) 조마조마 무서워’라는 것으로, ‘시계소리’라는 주어를 전혀 무시한 해석으로 더더욱 이상해 보입니다.
처음 이 시는 ‘오빠 가시고’라고 발표했다가 뒤에 ‘정지용시집’에 실릴 때 ‘무서운 시계’로 바뀌어 실렸습니다. 이렇게 시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마지막 이 구절이 말하려는 것은 어린 소녀 화자에게 ‘시계소리가’ 무섭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마서마’가 어떤 느낌의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당히 많이 무섭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시계소리 선득선득 무서워’ 정도의 느낌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이 시는 옛 시절의, 오빠를 타지로 떠나 보낸 한 소녀인 듯한 화자의 애틋한 오빠에 대한 사랑을 너무나 정감있게 그린 시로 우리에게 읽힙니다.
정지용 시인은 한국 현대시사(現代詩史)에서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위의 시는 그의 대표작에 드는 시는 아니지만, 서정시로서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오누이 사이의 그 절절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입니다.
1. 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2. 18쪽
2. 권영민.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 민음사. 2004. 4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