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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Blu Nov 24. 2023

한국에 온 대만 여자의 적응기

엄마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중국어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대만에서 온 엄마가 처음으로 부산의 가난한 동네에 둥지를 트시면서 하신 생각입니다. 엄마는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하고 결혼이민자가 되었지만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조차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출신인 엄마가 한국 부산 땅을 밟으신 건 1993년입니다. 한국의 1인당 GDP가 처음으로 대만을 추월한 시기는 2004년인데요. 엄마가 한국에 왔을 당시엔 대만이 한국보다 잘 살 시기였죠. (지금은 GDP만으로 경제 규모를 따지진 않지만 당시에 대만이 한국보다 잘 사는 건 사실이었어요) 그때 어머니께서는 한국이 카드를 안 쓰고 현금을 많이 쓰는 문화가 신기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집밥 문화부터 대중교통까지 엄마에겐 모든 게 신기했을 거 같아요. 오늘은 어머니의 눈으로 90년대 한국을 바라보려고 해요. 오늘은 사연을 설명하는 날이니 존댓말로 이어 나가보겠습니다.

대만의 유명한 우체통 포토스폿에서 언니와 나

‘어머, 절도를 이렇게 대놓고?’

 엄마가 어느 날 버스를 탔습니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으신 아주머님께서 앞에 서계셨어요. 어른에게 늘 깍듯하신 엄마는 자리를 양보했죠. 엄마가 짐과 함께 일어섰는데 아주머니께서 엄마의 짐을 강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엄마는 아주머님과 힘겨루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절도를 하다니요. 놀란 엄마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할 때 순식간에 빼앗긴 짐은 아주머님의 허벅지 위에 놓였습니다. 아무도 엄마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당연하죠. 아주머님께서는 엄마의 짐을 잠시 들어주시던 거뿐이니깐요. 내릴 때가 된 아주머님은 엄마 소유의 짐을 자연스레 반납해 주셨습니다. 한국의 ‘정’을 그때 처음 느껴졌다고 해요. 요새는 한국이 너무 흉흉해졌다고 모르는 사람끼리도 나눴던 '정'이 많이 사라진 거 같아 아쉽다고도 하시네요. 미움이 부족한 사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김치찌개와 김치찌개, 엄마의 요리세계

 대만은 집밥문화보다는 외식문화가 발달했어요. 중식은 웍이나 기름을 많이 쓰다 보니 집에서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도 하고 물가가 싸기 때문에 일찍이 외식 문화가 발전했다고 해요. 저도 어린 시절부터 종종 대만과 한국을 오갔지만 집밥을 먹었던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아침부터 뷔페식 정식당을 운영하는 곳도 많고 인당 돈을 지불하면 급식판 만큼은 음식을 마음껏 들고 올 수 있었어요. 대만식 토르티야인 ‘쇼좌빙’으로도 쉽게 끼니를 때울 수 있지요. 그런 대만의 외식문화와 부엌에 발 못 들이게 했던 외할머니의 집념을 미루어보면 엄마의 요리실력은 대충 예상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요리실력과는 별개지만 엄마가 한국에 온 초기에 일화입니다. 엄마는 찌개를 끓이고 있었어요. 찌개를 뜨고 고기를 먹던 아빠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 고기가 왜 이래’.


 알고 보니 엄마가 고기의 비계를 다 잘라버린 겁니다. 아빠는 비계를 가장 좋아했거든요. 엄마는 당당하게 이 부분은 버리는 거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이처럼 여러 실패 사례가 있지만 늘 실패만 하는 건 또 아닙니다. 엄마에겐 최강의 무기가 있었거든요. 바로 ‘김치찌개’입니다. 엄마의 김치찌개는 마법 같습니다. ‘엄마의 손길’이라는 고급스킬을 빼고 보더라도 엄마의 김치찌개는 어느 업장과 비교해도 부족할 거 없는 황금 밸런스의 맛이거든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어머니의 김치찌개는 엄마를 괴롭혔던 시댁마저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레시피를 여쭤봤을 때는 ‘그냥 만든 건데 왜 이렇게 다들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말도 하셨습니다. 언젠간 꼭 어머니표 김치찌개를 이어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떠오르니 배가 고프네요. 오늘은 어머니께 김치찌개를 부탁드려 봐야겠습니다.



한국은 너무 덥고 너무 추워

 엄마는 아열대지방인 대만 출신입니다. 겨울에도 경량패딩을 입는 곳이죠. 일 년 내내 날씨가 온화한 곳이라 스타후르츠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과일도 많이 나는 곳입니다. 엄마는 사계절이 뚜렷하던 그때의 한국에 오며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겨울엔 건조함에 적응하지 못하셔서 손이 텄고 지금도 주부습진과 각질을 달고 다니시죠. 핸드크림을 발라라고 쫓아다니며 다그쳤지만 일평생 적응하시지 못할 거 같습니다. 올해는 캠페인처럼 어머니의 콧방울에 바셀린을 발라 드리고 있습니다. 매번 콧물 때문에 피 흘리는 엄마를 올해는 꼭 지켜드리고 싶네요.


'눈물 왔다.' 엄마식 한국어

 엄마는 한국어를 잘 못하십니다. 여기서 ‘잘’의 기준은 모호하지만 시장에 가서 장은 볼 수 있지만 스타벅스에 가서 원하는 커스텀 커피를 주문할 정도는 안됩니다. 한때는 한국어를 가르쳐드리려고 시도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부터 ‘하‘ 사이의 '마'부터 엄마의 졸음은 견딜 수 없는 수준이 되곤 맙니다. 그렇게 잠든 엄마를 보면서 '그래, 우리가 평생 엄마의 귀와 입이 되어 드리면 되지.‘라 다짐합니다. 엄마의 손을 꽉 잡고 든든한 방패가 되어 드리려고 해요.


 훈민정음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엄마의 표현력은 가끔 놀랍습니다. 귀여움도 동반하고요. 그중에 제가 가장 아끼는 표현은 울 때 쓰는 ’ 눈물 왔다.‘입니다. 우리의 눈에 습기가 차서 눈물이 달랑거릴 때면 엄마는 눈을 부채질하며 '눈물 왔다!'를 반복합니다. 정확하게는 '눈물왕땅'이지만요. 너무 귀여운 표현입니다. 부산사람의 '잠 온다'에서 기인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이와 더불어서 식겁한 일이 생기면 ‘쉬 근 따암(식은땀)’이라던지, 건조기 A/S가 제대로 되지 않아 기사님께 '화났다!'이라고 외친다던지,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뒷배경이 자연스레 모자이크처리되는 게 좋으시다며 '잉물사아진(인물사진)'하는 발음이 굉장히 귀엽습니다. 가끔 한국말을 왜 안 가르쳐드리냐는 분들이 있으신데요. 저는 오늘도 '눈물 왔다!'라고 유별난 한국어를 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는 게 좋습니다. 어머니가 어느 날 엄청 정확한 발음으로 ’ 안녕하세요, 저는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왔습니다. 뵙게 돼서 기쁩니다. 반갑습니다.‘라고 말하면 매우 서운할 거 같네요.




신혼여행 때 가고 못 갔던 제주도에 약 30년 만에 함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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