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면 운명입니다만
엄마,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만났어?
엄마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셨다. 효심도 깊으셔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랑 평생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렇다고 남자를 만나는 걸 꺼리지는 않으셨나 보다. 엄마가 무용담처럼 말해주는 과거 남친(?)들은 의사, 변호사, 화려하디 화려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연예인급 미모의 어머니이니 소개팅도 끊임없이 들어왔을 터... 어쩌다 아빠를 만나게 됐을까.
사건의 발단은 엄마의 회사 동료였다. 으레 그렇듯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소개해준다는 그 회사 동료는 국적 다른, 말 잘하는 비즈니스맨와의 연을 놓았다. 엄마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비행기로 3시간가량 걸리는 그곳에 대한 걱정도 딱히 없었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큰 고민 없이 아빠를 만나고 있던 엄마. 외할아버지께서는 서른 넘어가는 엄마가 홀로 남겨질까 문득 걱정이 되셨던 거 같다.
'광광아, 너도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니?'.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아빠에게 가서 결혼을 하자고 했다. 아빠는 아직 형이 결혼하지 않았다며 시기가 이른 거 같다고 뒷걸음질 치셨는데 그 말을 들은 엄마는 한 말씀하셨다.
'그럼 헤어져.'
엄마의 박력에 아빠는 부랴부랴 결혼을 준비하셨다. 속전속결로 진행되던 결혼에 외할머님은 적잖이 당황하셨던 거 같다. 딸이 결혼 후 같은 땅을 밟는 게 아니란 걸 깨달으시고는 극구 반대를 선언하셨다. 하지만 이미 멀리 와버린 엄마는 결혼을 강행하셨고 외할머니는 끝끝내 결혼식에 참여하시지 않으셨다.
결혼식은 한국에서 한 번, 대만에서 한 번 진행되었다. 아빠는 모아놓은 돈이 없었고 엄마는 천만 원 단위에 돈을 저금해 두셨다. (오늘날에도 엄마는 근검절약의 아이콘이고 나의 롤모델로써 저금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신다.) 아빠는 엄마가 모은 돈으로 부유하지 못한 동네에 월세방을 잡았고 가구를 샀다. 딸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대만에서 바다를 건너오신 고령의 외할아버지께서는 달동네의 고르지 못한 땅을 걷기가 힘드셨고 삼촌이 외할아버지를 업고 딸이 살게 될 집을 보여드렸다. 15평도 안 되는 곧 무너질 듯한 집을 보며 외할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후에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그날을 회고하며 참아낸 이야기를 하셨다. 결혼식 전에 꼭 말하고 싶었다고.
'광광아, 내일 결혼 안 하면 안 되겠냐고'.
허나 하고 싶은 말을 삼켜내야 했던 외할아버지는 딸의 미래가 이어질 그 결혼식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이었다. 공장에서 물건이 나오면 해외 바이어들에게 파는 일을 했다. 견본품을 들이밀며 말로 사람을 홀리는 직업이어서 그런지 옥구슬처럼 순수했던 당시의 엄마를 구슬리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엄마는 아빠가 말을 잘하니 사업수완도 좋으리라 생각했고 건실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게 착각임이 밝혀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일례로 엄마는 아빠의 흡연 사실을 결혼 이후 알게 되었다. 아빠는 금연을 하겠다고 약속했고 막내딸인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흡연자이시다. 엄마는 그렇게 조금씩 속된 말로는 '흑화'했고 대만에서 보지 못했던 현실을 잔인하게 배워갔다.
아빠의 가족은 60년 대생답게 8남매로 자녀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신문기자로 동네에서 제일 돈이 많으신 분이었다던데 그 증거로는 유일하게 햄과 계란을 먹을 수 있다고 아빠는 회상했다. 술을 마시면 할머니와 자식들에게 폭행을 일삼았지만 외도를 하지 않는 거 만으로도 당시에는 나쁜 남편은 아니었던 거 같다. 슬픈 건 술고래였던 할아버지가 술을 무리하게 끊으셨는지 아빠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는 거다. 나는 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없고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겠지만 엄마는 종종 그가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에 좋은 아빠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2023년 현재, 우린 아빠의 가족들과 약간의 교류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신데렐라에 나오는 못된 계모들과 궤를 같이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남동생이 마치 꽃뱀에게 홀렸다는 듯이 낯선 땅에서 온 엄마를 대했는데 엄마가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게 된 건 아닌지 주시했고 엄마가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해서 번 종잣돈으로 자기 집 나전칠기를 마련했다. 또 우리 삼 남매가 어렸을 시절에는 중국어 사용을 못하게 하는 등 갖가지 방식으로 엄마와 우리 가족을 괴롭혔다.
그 시절 고모는 자주 우리 집으로 와서 언니를 데려가곤 했다. '너는 쉬어'라며 언니를 데리고 가 하루종일 데리고 있다가 보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고모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면서 엄마에게 가길 거부했다. 엄마는 그 후로 이 일에 관해 아빠와 크게 다투었고 그 뒤로 고모가 언니를 데려가서 자기 딸인 양 구는 일은 없었지만 고모들의 괴롭힘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된 거 같았다. 팔을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아빠의 팔을 늘 어김없이 안으로 굽었다. 엄마와 우리 삼 남매가 그 테두리 바깥쪽에 서있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결혼 한 달 만에 이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아빠는 담배를 마구 피워댔고 엄마의 부족한 요리실력을 이유로 삼으며 매일 고모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국어를 단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엄마를 그 작은 방 안에 방치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차가운 철문을 밀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내 축복이 되었을 생명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엄마는 떠나지 못했다.
누군가 20년 전 나에게 아버지를 미워하냐고 묻는다며 무슨 소리냐고 했을 거고 10년 나에게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고 5년 전이라면 그렇다고 답했을 거다. 그리고 취직을 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의 나는 아버지를 볼 때 오묘한 감정을 느낀다. 나조차도 다쳐가며 미워하기를 몇 년, 아버지가 가볍게 뱉은 말을 눈물로 젖셔 가지고 있길 몇 년, 회사를 다니며 아버지의 과거와 현재를 한심해하길 몇 년이 흐르고 나니 이젠 눈을 마주치기가 어렵다. 깊고 낮은 곳에 자리 잡아 썩어 곯은 그곳에 아버지를 가둬놨다. 언젠간 내가 괜찮아진다면, 내 마음이 누굴 미워하길을 멈춘다면 다시 아버지와 내 안의 그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해봐야겠다. 그리고 전해야지.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이제는 그 일을 그만두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