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의 유래...
원래 테니스는 골프보다 훨씬 귀족적인 스포츠였다. 스코틀랜드 목동들이 목초지에서 바람맞으며 하던 게 골프라면 테니스는 12세기 경에 프랑스 귀족들이 실내에서 우아하게 즐기던 것이다.
'주드폼(Jeu de Paume)'이란 경기가 그 원형이다. 프랑스혁명을 촉발시킨 그 유명한 '테니스코트의 서약(1789)'도 사실은 국왕이 회의장을 폐쇄하자 베르사유 궁전 내 주드폼 경기장에 삼부회 의원들이 모였던 것이다. 주드폼은 라켓 대신 손바닥(paume)으로 공을 쳤다 귀족들의 놀이다 보니 동작에 범절이 있었다 처음 공을 치면서 상대에게 "받으시오(Tenez)"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그 말을 영어식으로 읽어 테니스(Tennis)란 이름이 붙게 됐다. 오늘날 시속 200㎞나 되는 공을 가장 구석진 자리에 무지막지하게 날리면서 '서비스'한다고 말하는 모순도 여기서 나왔다.
프랑스 귀족들은 고상하게도 점수를 세는 데 시계를 이용할 줄 알았다. 시계를 4분의 1로 나눠 한 점 얻을 때마다 15분씩 바늘을 옮겼다. 15, 30, 40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그래서 생겼다. 그런데 왜 45가 아니라 40이냐고? 45로 하다 보니 듀스가 될 때 놓을 자리가 없었다. 앞으로 한 칸 당기니 자연스레 문제가 해결됐다. 점잖은 귀족들이 '15 대 빵'이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었다. '0'이 계란을 닮았다 해서 '뢰프(l'oeuf)'라 불렀다. 이것이 영국으로 건너가 '러브'가 됐다 테니스장에 난데없는 사랑 타령이 등장하게 된 연유다.
이렇듯 오래전에 서양에서 전해진 테니스는 1877년 윔블던 대회,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경기에서 채택되면서 널리 보급되었고 우리나라 테니스의 기원을 살펴보면 1883년 5월에 부임한 미국의 초대 공사 푸트에 의해서 도입되었고 미국공사관 직원들과 개화파 인사들과 테니스를 즐겼던 것으로 나와 있다.
또 다른 문헌에서는 국내에 테니스가 처음 전래된 것은 1885년 거문도로 나와 있다. 거문도 점령 사건이 일었났던 그 당시 영국군이 들어와 진지를 건설하면서 테니스장도 함께 지었기 때문에 국내 최초의 테니스장 거문도 해밀턴 코트는 바로 거문도에 있다. 영국군들의 점잖은 매너와 태도로 인해 거문도 주민들과 영국군들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영국군들이 거문도 주민들에게 테니스를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테니스 동호회는 1908년 2월에 탁지부(재무) 관리들이 결성한 회동구락부로 알려져 있으며 최초의 공식 경기는 1902년 서울-제물포 도시 대항 챌린저컵 테니스대회이며 그 후 1927년 9월 24일 열렸던 마이니치 신문 경성지국 주최의 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후에 경성사범학교 등 학교를 중심으로 론(lawn) 테니스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