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에는 탁구장에 나가기가 싫어졌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다. 집안에서 공부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있는 소년을 보면서 일하는 아줌마가
“너 탁구장에 안 가냐?”라고 물었을 때
'난 이제 세상 살기가 싫어졌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은 차마 드러낼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사춘기 소년의 거센 반항이었다.
이층 방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정오가 돼가자 식당 일을 도와달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들린다. 점심시간에는 식당 카운터에 앉아서 오는 손님들의 신발도 정리하고 곰탕 배달도 나가면서 소녀의 생각을 잠시 잊은 듯이 바쁘게 보냈다.
손님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바쁜 시간이 지나자 탁구장에 가고 싶어 졌는데 갈 수가 없는 것이 꼭 소녀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의 일과를 은근히 방해하는 거처럼 여겨져서 서운함과 화가 겹쳤다.
‘내가 다신 가나 봐라 진짜로 안 갈 거야’
이렇게 굳게 다짐을 하면서 초등학교 때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배웠던 하모니카를 꺼내 들었다. 당시 명품 악기인 영창 하모니카는 너무도 갖고 싶어서 사달라고 애원하면서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은 선물이었다. 오후 3시에 식당 쉬는 시간이 되면 가끔씩 소년이 불어주는 하모니카 소리가 제법 듣기가 좋았나 보다.
스와니강, 여수, 기러기, 반달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은 애창곡이었고, 이어서 “풍짝풍짝 풍짝풍짝” 흘러간 옛 가요 한 곡 ‘꿈에 본 내 고향’을 끝내면 다른 곡도 불러 달라는 아줌마의 앙코르 요청도 있었다.
하모니카를 부른 시간만큼은 속에 생긴 응어리가 씻겨나간 듯하여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여운도 잠시 감금된 약물중독 환자의 금단현상인지 방 천장에 탁구대가 보이면서 게임 이미지가 그려진다. 어떤 공이 오더라도 다 쳐내면서 요즘 배우는 펜홀더 루프 드라이브 타법이 코너 코너에 꽂히는 상상을 하니 내일은 꼭 저렇게 쳐볼 것이다.라고 하면서 작심 하루 만에 탁구장에 가지 않겠다던 다짐이 깨져버렸다. 탁구장에 가는 것이 소녀 때문이 아니고 새로운 타법의 완성을 위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존심을 세워본다.
참으로 엉뚱한 아이였다. 가고자 마음을 먹으니 시간이 가질 않는다고 내일을 못 기다려서 성화다. 다음날엔 평상시 일과대로 아침을 먹고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자 신성한 의식을 하듯이 라켓 집을 열어서 라켓을 꺼내 미지근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라켓의 고무 면을 정성스럽게 닦은 후에 조심스럽게 넣고 후다닥 집을 나선다.
집에서 뛰면 5분 거리인 탁구장에 도착하여 문을 여니 난로가 막 피워졌는지 가스가 섞인 연기를 밖으로 내보내느라고 창문이 열려있고 여직원이 바닥을 비로 쓸고 있다. 영업 준비 중이었다.
도와줄 일이라고는 탁구대를 물걸레도 닦아주는 것인데 겨울철이라 물걸레는 식당에서 더운물을 얻어서 수돗가에서 빨아야 한다. 식당으로 가는 문을 여는데 소녀도 탁구장으로 나가는 중이었는지 나랑 마주쳤다.
“안녕... 너 너 어제 뭐 했니? 안 보여서 궁금했어”
“궁금했다고?”
“응 조금”
“나 음... 밀린 공부 했어”
소년은 소녀가 걸어준 인사말에 쌓였던 서운함이 한순간에 풀려버렸고 그 순간 소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뜬금없이 “내가 탁구 가르쳐 줄까?”라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는 눈으로 대답을 한다.
소년은 설레는 마음으로 탁구 라켓이 있는 카운터까지 빛의 속도로 달려가 바구니에 담겨있는 라켓 중에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을 골랐다. 엄지와 검지를 사용하여 라켓을 쥐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소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닿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순간 호흡을 멈추기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공만 맞추는데 중점을 두면서 네트 너머로 공을 던져주는데 탁구대 앞에서 꼿꼿이 선 채로 라켓을 휘둘러서 볼이 제대로 넘어오지가 않는다.
손도 시리다고 벙어리장갑 왼손은 벗지도 않았으니 소녀에게 탁구는 그다지 재미있는 운동이 아닌가 보다. 20분이 채 되기도 전에 코를 찡그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그만하자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재미를 붙여주고 싶었는데 짧게 끝난 아쉬움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탁구장 문이 열리면서 선배가 들어온다.
소녀는 반색하면서 손짓으로 맞이하고 선배는 의젓한 오빠인 양
“큐미야 오늘도 제과점 갈래?”하고 대답을 기다린다.
“응 그럼 할머니에게 허락받고 올게” 하면서 깡총걸음으로 식당 쪽으로 사라져 간다.
나를 의식조차도 하지 않는 그 선배의 득의만만한 미소를 보면서 불안이 감지되는 것은 '혹시? 소녀의 손을 잡지는 않을까?'였다. 달리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을까... 무슨 수법이 분명 있을 터... 혼자만의 상상이 현실처럼 느껴진 순간 호흡이 불규칙해지는 분노가 인다.
소년은 어제에 이어 다시 한번 묘한 기분이 들어 시무룩해졌다. 나도 큐미에게 제과점 빵은 아니더라도 뭔가를 사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언뜻 드는 생각이 용식이네 붕어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