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마음
아이는 아빠를 보고 싶어 했다.
나에게는 보고 싶지 않은 남편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아빠가 아닌가.
아이의 마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니까.
아이를 보며, 아이들은 부모의 잘못을 잘 용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아빠의 폭력적인 모습을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일까?
나와 그와의 관계는 끝났어도 아이는 아빠와 비교적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아빠와 통화라도 시켜줄까 싶어서 “아빠랑 통화할까?”라고 하면 아이는 안 하고 싶다고 했다. 말로는 보고 싶다고 하면서 통화는 싫다니. 이유를 물어보면 직접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다. 아빠가 많이 보고 싶구나.
그가 아이와 놀러 가고 싶다고 했다. 목적지는 에버랜드. 사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은 '거리도 먼데 가다가 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그가 아이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아이를 데려가서 잠적해 버리면 어쩌지?'라는 여러 불안들이 올라왔다. 그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기도 했고 내 불안이 높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건 나의 불안이다.'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라는 말씀을 암송하고 나면 마음속에 날뛰던 불안들이 잠잠해졌다. 나를 도우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힘이었다.
아이에게 아빠와 둘이 에버랜드 가는 게 괜찮은지 물어보니 처음에는 엄마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일을 해야 해서 안된다고 얘기했는데 아이는 망설이다가 아빠와 가겠다고 했다.
아이가 그와 에버랜드 가는 날. 그는 갑자기 김치가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을 때라 너무 뻔뻔한 게 요구하는 건 아닌가 싶었고, 시댁에서 김치 보내주지 않냐고 하니 쌀도 김치도 안 보내주신다고 했다. 첫째 아들인 그에게 매정하다 싶었다.
순간의 안타까움은 있었으나 내가 친정에 놀러 와있는 것도 아니고 가정폭력으로 인해 별거 중인 사람에게 미안한 기색 없이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나 싶어, 안 보내주시면 사 먹으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마음 한편에 걸린 안쓰러움에 엄마에게 김치 여유분이 있나 물으니 있다고 한 통 챙겨주셨다. 아이와 도착한 그에게 김치통을 내밀며,
"앞으로는 사 먹어." 했더니 대뜸,
"남자 생겼어?" 이러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질문에 잠시 벙쪘다. 먹고사는 고민하느라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남자 때문에 내가 이런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어이가 없고 짜증이 나서,
"그래 생겼다!"라고 했고, 그는 김치통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차를 타고 가버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남자가 생겼냐고?! 내가 남자가 생겨서 별거를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쭉 냉랭하게 대했는데 어떻게 김치에서 남자로 연결될 수 있는 거지?! 별거의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닐 테고... 황당함에 엄마에게 그 일을 얘기했더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 아니냐며 그의 편을 드는 듯한 엄마의 말에 황당함이 두 배가 되었다. 대체 누구 엄마야!!!
그 후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늦은 밤, 아이를 재우고 자려고 누워있는데 그에게 장문의 문자가 왔다. 그에게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오는 경우는 대부분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으로 문자를 열어보았다.
공황증상이 생겨 응급실에 갔었다는 장문의 문자였다. 문자로 답할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울먹이며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일하려고 차를 운전하고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신호에 잠깐 멈춰있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고 식은땀이 나면서 손이 오그라들어서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숨을 안 쉬어지니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몰려오는데 두려웠다고 했다. 겨우 휴대폰을 집어 들고 둘째 동생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지만, 동생은 직접 도와줄 수 없으니 119에 연락하라고 했고, 결국 119에 신고해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응급실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는데 몸의 이상은 없다고 했고, 공황장애라고 했다. 응급실에 둘째 동생이 왔었고, 그에게 왜 이러고 사냐, 이제는 좀 내려놓으라고 했는데 그는 어떻게 놓냐고 했다고. 병원에서는 정신적인 응급상태라며 의사가 입원을 권했지만,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니 입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둘째 동생 통해서 자기 엄마도 오늘 일을 들었을 텐데 자기에게 전화 한 통을 안 하더라며, 결국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이건 자기 보고 죽으라는 얘기 아니냐며 서럽게 오랫동안 울었다.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그의 감정이 너무도 커서 버거웠다. 자기 아들에게 실망했을 수도 있고, 화가 났을 수도 있다. 그래도 삼 형제 중 첫째 아들 아닌가. 전에는 꼬박꼬박 보내주던 쌀도 안 보내주고 김장김치도 안 보내주고... 아들이 자기에게 전화할 때까지 절대 연락 안 하는 그분의 어머니.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혼자 지내는 상황이면 자기 아들을 챙길 법도 한데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나와 통화하는 내내 본인의 감정을 쏟아내었다. 무섭고, 외롭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그런 그를 보며 의사가 말한 응급상황임이 느껴졌다. 의지하고 싶은데 의지할 사람을 찾지 못해 절규하는 그의 마음. 그를 위로했지만, 나를 의지하게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힘들 때 위로받는 대상이 내가 되어버리면 그가 마음정리하기 더 어려워질 것이고 관계를 정리하기 더 어려워질 것 같았다.
그날 1시간 넘게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가 죽지 않고 살기를.
불안함에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그를 도와주시기를 간구했다.